[천남수의 視線] 간첩을 공개 신고합니다
필자가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구호는 ‘밤새 쓸자’와 ‘간첩 잡아 1억 원 상금 타고 1년간 휴가 가자’였다. 1980년대 군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구호를 기억하리라 짐작된다. ‘밤새 쓸자’는 전방부대에 근무한 사람이라면 끝없이 내리는 눈을 쓸고, 또 쓸어야 했던 기억이 남다를 것이다. 군에서는 언제나 이동 경로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다그쳐 그칠 때까지 눈을 치우게 했다. 밤새 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간첩 잡아 1억 원 상금 타고 1년 간 휴가 가자’는 말 그대로 간첩을 잡으면, 거액의 포상금과 함께 장기 휴가를 준다는 것이다. 1981년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3000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로또 1등 당첨금보다 많은 금액이다. 특히 1년간의 휴가는 30개월 복무 기간에 12개월이나 집에서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대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해안이라면 모를까, 험악한 산지가 대부분인 최전방 부대에 간첩이 출몰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간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었던 것은, 그만큼 군 생활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간첩(間諜)!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 동서고금을 통틀어 적의 상황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까지 ‘간첩 신고는 113’이란 구호가 익숙했듯, 간첩은 우리 일상에 늘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이 간첩 사건에 연루된다면 이는 파멸을 의미했다. 연좌제도 있었던 시절이라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이 무시무시한 간첩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상 논쟁이 그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다. 박정희 정권이 반공을 국시로 삼고, 정적인 김대중을 공격하기 위해 ‘색깔론’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해 용공 분자, 친북 인사, 공산주의자라는 이념 공세를 가했다. 1997년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국정 방향으로 제시할 정도로 그에 가해진 이념 공세의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최근에는 몇몇 극우 보수 유튜버들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간첩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달 26일에는 박인환 경찰제도발전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퇴직자 모임의 토론회에 참석해 비슷한 주장을 했다가 논란이 됐다. 그는 “최근 간첩단 사건이 나오는데, 문 전 대통령의 비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70% 이상의 국민이 문 전 대통령이 간첩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한 것. 결국 문 전 대통령이 간첩이라는 말이 되고 말았다. 더불어민주당은 박인환 위원장을 허위 사실 명예훼손으로 고발한다면서 강력히 반발했다.
박 위원장이 언급한 간첩단은 창원과 제주, 전주 시민단체와 수원 민노총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들의 암약을 도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간첩단 사건은 늘 발생했다. 간첩단에 연루된 사람들은 무거운 처벌을 받았고,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농담으로라도 간첩이란 소리를 들으면 화부터 내는 이유다. 무시무시한 간첩, 그것도 전직 대통령을 향해 간첩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경직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 사회가 이념 논쟁의 어두운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배경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반국가 세력’ 발언이 촉발한 측면도 있다. 다분히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듯 보이는 종전선언 주장에 대한 반국가 세력 규정은 우리 사회를 다시 한번 이념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윤 대통령의 반국가 세력 언급은 나아가 북한 2중대, 공산주의자, 간첩 등 한층 업그레이드된 이념 공세로 재현되고 있다. 마치 6·25로 촉발된 좌우 대립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착각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됐을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특히 2018평창동계올림픽은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시대의 분기점이었다. 해빙기를 맞은 한반도는 마침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남북에 이어 한반도 평화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은 새로운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한순간에 한반도 평화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는 한반도 평화의 길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북·미 회담 결렬에 이어 코로나가 덮쳤다. 세계는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로 바뀌었고, 한국도 보수정권이 들어섰다. 대북 정책의 변화가 예고됐다. 미국은 북한 봉쇄를 기조로 하는 강경 정책을 유지했다. 동시에 중국 견제를 위한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도 있었다. 한반도에 다시 긴장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강요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는 이념 공방이 시작됐다. 대화보다는 압박이, 평화보다는 대결이 우선됐다. 평화를 위한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비둘기파는 힘을 잃고, 힘에 의한 우위, 북한 적대시 정책을 주장하는 매파가 힘을 얻었다. 자연히 남북 간의 적대감은 고조됐다.
이것이 간첩이 등장한 배경이 됐다. 아, 드디어 간첩을 색출해야 할 때가 됐다. 비록 간첩이 실존하지 않을지라도 적대적 상대가 존재하는 이상,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간첩까지도 찾아내야 한다. 간첩 잡아 1억 원 상금 타고 1년간 휴가 갈 수 있는 ‘대박’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간첩을 공개 신고한다. 동시에 나의 내면에 숨어있을지 모를 ‘심리적 간첩’도 함께!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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