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빛이 공포에 일렁입니다. 그의 떨리는 손을 한 중년 남성이 꽉 잡아줍니다. 군인들에 의해 끌려온 차디찬 창고, “철컹”소리가 들려 온 직후였습니다. 자물쇠를 거는 소리였지요. 죽음을 예고하는 장송곡처럼 들렸습니다.
주름이 가득한 이 남자는 애써 미소 지으며 주변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았고, 눈을 맞추며 포옹합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지요. 두려워하지 말자고, 잠깐 눈 감고 일어날 뿐이라고, 눈을 다시 떴을 땐 푸른 잔디와 구름이 펼쳐질 것이라고, 우리는 그 평화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것이라고요.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취이익.” 천장에서 증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다른 아이들은“엄마”, “하나님”을 외칩니다. 중년 남성은 떨리는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아이를 감쌌습니다. 아이들은 젖을 찾는 신생아처럼 그에게 달려들었지요. 그도 아이들을 힘차게 안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자라고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창고는 침묵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의 몸은 엉켜 있었지만, 창고의 냉기만큼이나 차가워져 갔습니다.
1942년 8월 6일, 폴란드 트레블링카 수용소.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장소입니다. 190명에 달하는 아이들은 유대계 폴란드인 고아들이었지요. 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인물의 이름은 야뉴시 코르차크.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의사, 문학가였습니다. 폴란드에서는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였지요. 사회적 리더로 꼽히는 그가 왜 고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것일까요. 수많은 아이가 이유 없이 죽어가는 오늘날, 저는 이 사내가 떠올랐습니다.
건실한 집안에서도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
“내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야누시 코르챠크의 본명은 헨리크 골드슈미트. 1878년(혹은 1879년) 7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존경받는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복하게 자랐을 법했지만, 그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인 아버지가 그가 10대 초반이던 시절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사내 티도 나지 않던 코르차크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뒤숭숭한 집안 환경에서도 그는 올곧게 자랐습니다. 부유한 집 아이의 가정교사를 맡으며 가족을 부양했지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돈을 버는 처지에도 가난한 아이들이 당하는 수모를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감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아이는 어른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 전차 안에서 마구 밟히고, 고함을 듣고, 뺨을 맞기 일쑤인 존재들. 바로 아이였다.” 그의 글에서도 아이를 향한 사랑이 새어 나오지요.
따뜻한 감성, 남다른 교육철학으로 자신이 맡은 아이들을 보살핍니다. 그의 감성은 때로는 문학적 재능으로 피어나기도 했었지요. 꽤 여러 권의 습작을 써 내려갔습니다. 1898년 폴란드 바르샤바 의대에 들어간 뒤 소아과 의사가 된 뒤에도 펜을 내려놓지 않았지요. 한 잡지에 기고한 ‘응접실의 아이’란 글로 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야뉴시 코르차크였습니다. 의사로서의 헨리크 골드슈미트와 문학가로서의 야누시 코르차크, 두 정체성이 싹을 틔운 것이지요.
가난한 이에게 한없이 다정한 코르차크
“돈 없으시죠? 이번에는 그냥 가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타고난 인성의 사나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에는 진료비도 청구할 줄 모르는 순둥이였으니까요. 대신 부자 환자들에는 거금의 돈을 요구할 줄 아는 대범함도 있었습니다. 그에겐 무엇보다 약자를 돕고자 하는 천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1905년 3월. 그가 러시아 제국군(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에 군의관으로 징집된 때입니다. 러일전쟁에 투입된 그는 중국 하얼빈과 선양에 파견을 나갔지요. 끔찍한 전쟁이 불러온 참상을 경험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진흙 위에 앉아 통곡하는 어린이들,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아이들, 초점을 잃고 거리에 널브러진 작은 영혼들. 코르차크가 담기엔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지요.
가난하고 아픈 아이를 의료적으로 보살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아이의 상처는 그의 곁에서 아물었지만, 지옥같은 세상은 그에게 다른 생채기를 줄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손을 건넸습니다. “아저씨 집으로 가자, 가서 따뜻한 수프를 먹자꾸나.”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스타 의사 코르차크
1907년 초 전쟁에서 돌아온 때였습니다. 바르샤바에서 고아구호회를 운영해온 엘리아스베르크 부부가 코르차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에게 권유합니다. “고아원 원장을 맡아주세요, 당신이 적임자입니다.” 이따금 시설에 봉사 오는 코르차크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주머니엔 늘 사탕과 요술도구가 가득했고, 입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옛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아이들은 그에게 엉겨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지요. 홀쭉하고, 머리숱이 적은 이 남자는 아이들의 스타였습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합니다. “예, 제가 해보겠습니다.” 바르샤바의 유대 아동 고아원 ‘고아들의 집(Dom Sierot)’과, 비엘라니의 폴란드 아동 고아원 ‘우리들의 집(Nasz Dom)’의 시작이었습니다.
바르샤바 시민사회는 놀랐습니다. 이미 지역의 스타인 그가 고아원 원장으로 전격 결정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저는 아이들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의 밑에서 일해보고 싶은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었지요. 선(善)의 선순환이었습니다.
그의 고아원은 시혜적인 다른 기관들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코르차크는 아이들을 “미래의 인간”이 아닌 “현재의 인간”으로 보았지요. 아이들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살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의회와 법정을 세웁니다. 부당하게 대우하는 교사나,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를 법정에 세웠지요. 그들 스스로 의사를 표현할 신문 ‘리틀 리뷰’도 만들었습니다. 그의 고아원이 ‘어린이 공화국’으로 불린 이유였지요.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에 휘말린 고아원
역사의 격랑이 코르차크와 아이들을 덮칩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입니다. 코르차크의 나이 61세. 늙은 노의사가 된 때였지요. 고아원 주위로 폭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나가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을 불러놓고 웃으며 이야기했지요. “얼른 피해야겠다, 내 대머리는 비행기가 표적으로 삼기에 딱 좋을 테니까.” 아이들의 웃음이 까르르 터졌습니다. 그는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나치가 바르샤바를 점령합니다. 이미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지요. 폐허 어딘가에서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지요. 코르차크는 여기서 또 한 번 감탄합니다. “대학살에도, 인간의 엄청난 파괴성에도, 아이들의 강한 생명력은 이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누구도 창문을 깼다고 아이를 때리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을 지날 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게토(진단거주지역)로 몰아넣었습니다. 코르차크와 고아원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강제로 이주당해야 했습니다. 어른 혼자서도 제 몸을 건사하기 어려운 상황의 지속됩니다. 음식은 적었고, 감시는 삼엄했습니다. 날은 점점 추워졌지요. 그는 백방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해 뛰어다녔습니다. 지친 몸이었지만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요.
삶이 그 지독한 무게를 더해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코르차크를 평소 존경해 왔던 이가 찾아왔습니다. 이고르 네베를리라는 사내였지요. “선생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사실 수 있게 위조 신분 서류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코르차크는 반문합니다. “아이들은?.” 그가 어렵게 입을 뗍니다. “최대한 숨겨보겠습니다.”
곰곰히 생각에 잠긴 코르차크가 말합니다. “나는 모든 아이가 확실히 안전하기를 바란다네.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있는 것이 최선이네.” 그는 190명에 달하는 모든 아이가 온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던 시기, 제 한 몸 건사하려는 욕심을 부릴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지요.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아이들과 함께했다
“알레 유덴 라우스”(유대인들 다 나와)
1942년 8월 5일. 나치가 게토의 고아원을 찾아옵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들은 고함쳤지요. 아이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코르차크는 편안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말했지요.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나오렴, 우리가 가는 곳에는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가득한 곳일 거야. 평소에 자주 가던 캠프 같은 곳 말이야.” 준비가 끝난 그는 한 손으로 다섯살 아이를 안았습니다. 다른 손으로는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지요. 폴란드 시민들이 “코르차크 선생님이야”라고 술렁 거립니다.
그 순간 한 독일 장교가 그에게 쪽지를 건넸습니다. “신호를 주면 당신을 이 행렬에서 빼주겠소.” 유럽에서 유명 인사인 코르차크를 구해줄 수 있다는 구원의 메시지. 또 한번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섰습니다.
그러나 코르차크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쪽지를 다시 건네줍니다. 홀로 산다는 건 구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도 죽음도 그에겐 아이와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지요. 그는 다시 동요 없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때로는 아이들이 잘 오고 있나 지켜보면서.
걸음의 끝에는 열차가 서 있습니다. ‘절멸의 장소’라 불리는 트레블링카 수용소가 목적지였습니다. 코르차크의 뒤에 선 아이들은 인형을 안고 저마다 천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지요. 아이들은 코르차크만을 믿는다는 듯 의연히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대인 행렬에 가해지는 채찍질 속에서도, 190명의 아이들만큼은 묵묵히 줄을 맞춰 걸었습니다. 지옥의 복판을 걷는 ‘천사들의 행진’이었습니다
코르차크와 190명의 아이는 그날 모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군가를 위해 죽는 일은 더욱 희소합니다. 코르차크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1979년 유네스코는 그 해를 ‘어린이의 해’이자 ‘야누시 코르차크의 해’로 선포합니다. 코르차크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어린이 인권 옹호의 선구자로서 그를 기리는 최소한의 행동이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불꽃은 쉬이 꺼지지 않습니다.
코르차크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오늘 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화를 소개합니다. 코르차크가 바르샤바 교육대학에서 아동심리학 강의를 했을 때입니다. 어린이병원의 엑스레이실에 수강생을 모아놓고 한 남자 어린이를 데리고 그가 나타납니다. 첫 강의 제목은 ‘아이의 심장’. 아이는 코르차크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지요. 그는 말없이 아이의 웃옷을 벗겨 장치에 세웠습니다. 그러고는 강의실의 조명을 껐지요.
스크린 속 아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습니다. 낯선 공간, 어두운 분위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 아이는 떨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코르차크는 말합니다. “이 심장을 절대 잊지 마세요, 아이에게 손찌검하기 전에, 어떤 벌을 내리기 전에, 겁먹은 아이의 심장을 마음속에 떠올리세요. ” 코르차크는 아이의 옷을 얼른 입히고는 손을 꼭 잡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강의실을 떠났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코르차크의 숭고한 희생이 어느덧 여든 해를 지났습니다. 여전히 너무 많은 아이가 학대받고 있습니다. 신문 지면에는 이름 모를 아이들의 죽음이 머리기사로 채워집니다. 코르차크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 아이의 심장은 어떤 모습인지, 그 아이는 당신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요.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네줄요약>
ㅇ폴란드 의사 코르차크는 고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서였다.
ㅇ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그는 게토에 갇혀서도 고아들을 위해 분투했다.
ㅇ학살당하기 직전 그는 도망칠 기회를 마다하고 아이들과 최후까지 함께했다. 유네스코는 1979년을 코르차크의 해로 삼았다.
ㅇ오늘날 너무 많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 코르차크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새기는 이유다.
<참고문헌>
ㅇ베티 진 리프턴, 아이들의 왕 야누시 코르차크, 양철북, 2020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