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부터 확실히 합시다"…첫 대화부터 신분 '위장'하고 염탐했던 남북

양은하 기자 2023. 7.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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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신분부터 확실히 밝힙시다.

52년 전 판문점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는 '서울'과 '평양'의 뜻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인사들이 신분을 위장한 채 참석했다가 서로를 확인하는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 6일 통일부가 공개한 제3차 남북회담문서 사료를 보면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 참석자였던 북측 김덕현 차석대표가 남측의 정홍진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에게 '진짜 신분'을 묻는 대화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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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적십자 회담 참석자들, '진짜 신분' 확인한 대화 공개
분단 이후 첫 대화에 '진의 확인' 의지 커…고위급 회담되기도
1972년 5월31일 박성철 북한 제2부상이 서울 방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북: 신분부터 확실히 밝힙시다. 나는 노동당 조직담당 책임지도원입니다.

남: 나는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고 전직은 대통령 직속기관의 국장입니다.

북: 그러면 CIA를 말하는 것입니까?

52년 전 판문점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는 '서울'과 '평양'의 뜻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인사들이 신분을 위장한 채 참석했다가 서로를 확인하는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 6일 통일부가 공개한 제3차 남북회담문서 사료를 보면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 참석자였던 북측 김덕현 차석대표가 남측의 정홍진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에게 '진짜 신분'을 묻는 대화가 등장한다.

남북은 1971년 8월20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을 시작으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는 남북이 분단 이후 처음 대화에 나선 것이었지만 정확히 말해 '당국 간' 대화는 아니었다.

적십자 예비회담에서 북측의 태도가 상당히 미온적이라고 여긴 정홍진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김덕현에게 '따로 만나자'는 쪽지를 보냈고 이튿날인 71년 11월20일부터 남북은 '비밀 접촉'을 시작했다.

세 번째 '비밀 접촉'에서 김덕현은 적십자 회담 이야기로 운을 뗀 정홍진을 향해 "회담문제는 그만두고 더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자"면서 "먼저 우리의 신분부터 확실히 밝히고 이야기 하도록 하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노동당 조직담당 책임지도원'이라고 밝히며 "당신 이야기를 책임있게 고위급에 전달할 수 있고 또 책임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간 신분을 위장했다는 사실을 먼저 실토한 것이다.

이에 정홍진도 뜸 들이지 않고 "나의 현직은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고 전직은 대통령 직속기관의 국장"이라며 "당신 이야기를 책임있게 보고할 수 있고 책임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남북 모두 이산가족 상봉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적십자회담 자리에 '관계자 외' 인물을 투입시켜 서로를 '염탐'해 왔으며 이를 서로 공식적으로 확인한 대화를 나눈 셈이다.

김덕현은 "그러면 CIA를 말하는 것이냐"며 '대통령 직속기관'의 정체를 거듭 확인하기도 한다.

이는 서로를 속인 것일 수도 있지만 정홍진이 김덕현에게 '쪽지'를 보냈고, 김덕현이 '진짜 신분'을 물은 것으로 보아 9차례 적십자 예비회담을 진행하면서 어느 정도 서로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마주 앉은 자리인 만큼 상대의 진의를 알고자 하는 남북 지도자들의 의지가 강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11차까지 이어진 '비밀 접촉'은 당시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만남으로 연결돼 남북 첫 합의문서인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라는 결실까지 맺는다.

또 이후로도 남북 간 회담에서는 늘 '모자'(원 소속과 다른 직급 혹은 신분을 내세운)를 쓴 당국자가 참석하는 것이 관례화됐다. 남북은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언급하지도, 또 문제 삼지도 않는다.

yeh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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