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경제 강국’이 되었나? [최병천의 아웃사이트]
편집자주
자기주장만 펼치는 시대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찰력’(인사이트)이 아닌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아웃사이트)이 필요합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격주로 여러 현안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고정관념을 넘은 새로운 관점의 글쓰기에 나섭니다.
2021년 7월이었다.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무역개발이사회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하는 결정을 했다. 참여 회원국의 만장일치였다. 한국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한 최초의 국가이며, 유일한 국가가 됐다.
UNCTAD의 결정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국뽕 관점에서는 매우 흐뭇한 소식이었다. '아, 대한민국이 이렇게 대단하다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 ‘사회과학적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과학은 진보 계열이 주도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잘못된’ 경로라고 비판해왔다. 외세에 의한 분단, 독재 정부와 재벌의 결탁, 경제는 대외의존적 구조라고 비판해왔다. 196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 사회과학의 주류적 담론이었다. 논점은 약간씩 바뀌었다. 경제적 종속, 외채망국론,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으로 한국경제는 금방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국경제의 파탄은커녕 ‘선진국’이 돼버린 것이다.
2021년 한국의 선진국 진입이 ‘사회과학적 사건’인 이유
한국은 왜, 어떻게 선진국이 된 것일까? 현재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3만5,000달러다. 1인당 GDP와 인구수 모두를 고려한 국가GDP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10위 국가다. 1인당 GDP만 비교하면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도대체, 어떻게 한국은 경제 강국이 된 것일까?
[그림-1]과 [그림-2]는 한국이 경제 강국이 된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림-1]은 1960~2018년 기간, 세계 GDP 대비 상품무역의 비중 추이다. 세계 GDP에서 ‘교역비중 변화’를 보여준다. [그림-2]는 1960~2015년 기간, 한국 GDP 대비 수출 비중 추이다. 한국 GDP에서 ‘수출비중 변화’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림-1]과 [그림-2]의 패턴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마치 복사한 것처럼 유사성이 매우 높다.
세계 GDP에서 ‘교역 비중’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림-1]을 보면, 총 4번의 국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1국면은 1960년대~1970년대 초반까지다. 이 시기는 국제교역 확장기였다. 1960년대 초반 국제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5%였다. 1970년대 초반에는 약 30%로 확대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GATT 체제에 의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자유무역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IMF는 국제통화기금을, GATT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의미한다. IMF는 국제적인 금융질서 안정을, GATT는 국제적인 자유무역 확대를 목표로 했다. 미국 외교는 본래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모두 참전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 번은 독일에 의해, 한 번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의해 참전하게 됐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미국은 ‘세계평화 구상’을 하게 된다. 미국이 구상한 전후(戰後) 세계평화 전략의 3대 축은 유엔, IMF, GATT였다. 물론 이를 실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었다. 제2국면은 1970년대 초반~1990년대 초반까지다. 이 시기는 국제교역 정체기였다. 제1차 석유파동과 제2차 석유파동이 있던 시기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제교역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지난 70년, 글로벌 교역에서 4번의 국면 변화
제3국면은 1990년대 중반~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까지다. 세계 GDP에서 30%를 차지하던 국제교역 비중은 50% 수준까지 급증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한다. 개혁개방을 본격화한다. 1989년 동독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독은 붕괴하고 서독과 흡수통일을 했다.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민중 시위가 발생한다. 공산주의 체제는 붕괴됐다.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합류한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이 그랬다. 1991년에는 소련이 정식으로 붕괴한다. 1992년에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계기로 중국이 수출중심 산업화 노선을 본격적으로 채택한다. 중국경제의 특색인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용어는 1992년 제14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됐다. 몰락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합류한다. 이 시기 세계 자본주의 규모는 2배로 늘어난다.
제4국면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최근까지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보호 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중국 역시 중간재의 국산화를 통해 무역 비중이 줄어든다. 201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중국견제가 본격화된다. 세계 GDP에서 교역 비중은 4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림-1]은 세계경제 GDP에서 교역비중 변화이고, [그림-2]는 한국경제에서 수출 비중 변화다. 두 그래프가 마치 ‘복사를 한 것처럼’ 모양새와 추세선이 똑같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한국경제가 세계경제와 동조율이 매우 높은 나라임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주요한 주체들이 ‘국제적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음을 의미한다. 그럼, 한국경제를 움직였던 주요 주체는 누구였을까? 1990년대 이전까지는 관료가 주도하고, 대기업이 따라오는 형국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이 주도하고, 관료가 지원해주는 형국이었다. 어느 집단이 그러하듯, 한국의 관료집단과 대기업 집단 역시 공과(功過)가 있다. 그러나, 공(功)이 훨씬 많았다.
한국이 경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제적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최근까지 약 70여년간의 과정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국제적 환경변화와 한국 내부의 적응과정을 연결해보면 아래와 같다.
세계경제 1국면은 국제교역 확대기였다. 한국은 이 시기에 농지개혁, 수출노선의 전면화,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하나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엄청난 갈등을 수반했다. 그러나, 잘했던 일들이다. 그때 이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오늘날처럼 경제강국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경제 2국면은 국제교역 정체기였다. 한국은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했다.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안보위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미중 화해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전면 철수할 예정이었다. ‘평시에는 중화학공업, 전시에는 방위산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세계경제 3국면은 국제교역 확대기였다. 한국은 이 시기에 민주화와 북방외교가 이뤄졌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민주화 국면’에 기여한 정부들이다. 동시에 북방외교에 기여한 정부들이다.
세계경제 4국면은 국제교역 축소 및 재정비 시기다. 이 시기를 단순히 교역의 축소기로 보면 안 된다. 세계는 지금 ‘중국을 대체할 만한’ 제조업 개발도상국을 찾는 중이다.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가 주목받는다. 희토류 등의 자원 민족주의도 재부상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 정치를 넘어 ‘세계 질서 변동’을 주시해야
그간 한국의 경제학자들, 노동전문가들은 한국경제 불평등의 원인을 ‘국내적’ 원인에서 찾았다.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남용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그 연장이었다. 그러나, 원인 진단부터 틀렸다. 한국경제 불평등의 출렁거림은 ‘글로벌 경제’와의 관계에서 찾아야만 한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의 핵심 논지다.
한국 정치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현재 진보·보수는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재주가 누가 더 뛰어난지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며, 미래를 개척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세계질서 변동을 주시해야 한다. 국제적 환경변화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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