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내 눈에 총을 쐈지만...딸들의 자유 위해 계속 싸우겠다"[인터뷰]
경찰이 시위대 눈 겨냥 페인트볼 총 쏴
"딸의 꿈은 가수, 히잡 벗을 자유 주고파"
필요한 건 국제사회 관심과 응원
나의 분신, 내 딸에게
그날 밤 엄마도 겁이 났어. 지난해 9월 스물두 살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의문사한 이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시위에 나갔지. 너를 생각하면 절로 용기가 났어. 사람들과 함께 "여성, 생명, 자유!"를 목청껏 외쳤지.
마스크를 쓴 사복경찰 20여 명이 번호판을 가린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어. 페인트볼 총으로 나이 든 여성들을 골라서 겨눴어.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지. "쏘지 마, 우리 엄마야!" 그 순간 내 오른쪽 눈으로 파란색 페인트볼이 날아들었어.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들은 내 눈을 조준했던 거야.
눈에서 피가 철철 흘렀어.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끔찍했던 건 네 할머니가 모든 걸 보셨다는 거야. 내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거기 계셨거든.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내가 옆에 있으면 경찰들이 너를 건드리지 않을 거다"라면서. 할머니와 함께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너무 후회돼.
이제 겨우 열 살인, 신의 존재도 모르는 너는 얼마나 놀랐을까. 오늘도 너는 의사라도 된 듯 다친 내 눈을 오래 들여다보았지. 찡그리기는커녕 미소 지으면서 말이야.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이. 너의 분노와 용기가 매일매일 커져 간다는 걸 엄마는 알아.
3대에 걸친 우리 모녀가 이런 고통을 겪는 건 우리가 이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것도 여성으로. 그 고통의 고리를 우리 손으로 끊어내겠다고, 그래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되찾겠다고 엄마는 결심했어. 그날 밤으로 돌아가도 엄마는 망설임 없이 거리로 나갈 거야.
앞을 보지 못하는 내 눈은 치욕이 아니야. 명예로운 훈장이야. 그들은 내 목소리만은 빼앗아가지 못했어. 싸움은 계속될 거야. 그래야만 해. 과거로 돌아갈 순 없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이란 여성 메르세데 셔힌커르가 한국일보에 보내온 이야기와 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메르세데 셔힌커르(38)다.
이슬람 신정 체제의 '히잡 강제'가 도화선이 돼 이란 전역에서 불타오른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15일. 메르세데와 그의 어머니는 수도 테헤란 번화가 사터르컨의 시위 인파 속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지키기 위해 매번 시위에 따라나섰다.
시위대를 공격한 사복경찰은 메르세데의 눈을 겨냥해 페인트볼 총을 쐈다. 메르세데는 5시간 넘는 수술을 3번이나 받았지만, 오른쪽 눈의 동공과 수정체를 잃었다.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시위 중에 '눈 표적 공격'을 당한 건 메르세데만이 아니다. 이란 반정부 성향 매체 이란와이어에 따르면, 테헤란과 쿠르디스탄 지역에서만 최소 580명이 실명했다. 전국적인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의 한 안과 전문의는 "동료 의사들한테 들은 사례까지 포함하면 눈을 다친 시위자는 1,000명이 넘는다"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이 같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국제사회의 주목도도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미국에 본부를 둔 이란인권센터(CHRI)에 따르면, 지난달 17일 테헤란예술대학에서 복장 단속에 항의하는 학생 10여 명이 구금됐다. 이란 전역 대학 10여 곳에서 항의 성명이 잇따랐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정권도 시위대도 서로 극도로 조심하는 상황이지만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필요한 건 국제사회의 관심과 응원이다. 메르세데가 고민 끝에 한국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이유다. 그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 딸과 함께 지난 3월 튀르키예로 피신한 뒤 SNS로 싸움터를 옮겼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나와 이란인들은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서면으로 나눈 인터뷰 일문일답.
-다친 눈 상태는 어떤가.
"0.5m 안에 있는 물체만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눈앞이 계속 번쩍거리고 선이 자꾸 나타나 어지럽다. 가려움과 찌르는 듯한 통증도 겪고 있다. 동공이 없고 눈동자가 까맣게 변해서 렌즈를 삽입한 상태다."
-왜 시위에 나갔나.
"이전엔 시위나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위가 시작된 첫날부터 매일 거리로 나갔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성직자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딸과 모든 아이들의 미래에 해를 끼치는 정권을 몰아내고 싶었다. 이란에서 산다는 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생인 메르세데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들어선 이슬람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이슬람 공화국은 히잡 강제가 상징하는 자유 말살과 여성·약자 탄압으로 독재 정권을 유지하면서 "신의 명령이니 복종하라"고 했다. 메르세데가 이번 시위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히잡을 벗은 건 어떤 의미인가.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건 신정 체제가 금지하는 행동이다. 히잡 거부는 이슬람 공화국에 반대한다는 뜻이고, 더 이상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눈을 공격받던 상황은 어땠나.
"평소처럼 나와 어머니, 지인 3명이 함께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을 모으며 구호를 외쳤다. 곧 사복경찰이 나타나 시위대를 향해 페인트볼 총을 쐈다. 나이 든 여성들까지 겨눴다. 어머니는 그전에도 페인트볼 총을 다리에 맞으셨다. 다친 부분이 곪아서 걷는 게 어려울 정도로 한동안 고생하셨다. 어머니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항의했더니 내 눈에 쐈다."
-경찰이 일부러 눈을 노린 건가.
"그렇다. 분명히 의도했다. 경찰의 잔인함에 겁을 먹고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다."
그럼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고 여성들을 지지하는 남성들이 대거 동참한 히잡 시위는 이슬람 혁명 이후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된 시위다.
-평화 시위인데도 무력 진압을 한 건가.
"시위 참가자들은 자발적으로, 맨손으로 거리로 나왔다. 마을이나 광장에서 매일 모여서 구호를 외친 게 전부다. 소년, 소녀들도 함께했다. 하지만 정권은 시위대를 구타하고 체포했다. 실탄 진압도 했다. 15세 미만 아이들까지 잡아가서 죽였다."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IHR)에 따르면, 어린이 71명을 포함한 최소 537명이 시위 중 사망했다. 지난해 12월 시위 참가자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처형당한 이후 총 7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눈을 잃은 뒤 움츠러들진 않았나.
"사라진 내 눈은 명예로운 훈장이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어린 내 딸은 처음엔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딸은 나처럼 강한 사람이다. 고통을 이겨냈고, 이제는 '엄마가 나와 다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을 했다'면서 나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딸의 꿈은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다. 딸은 꿈을 꼭 이뤄서 이란으로 돌아가서 아주 큰 콘서트를 하겠다고 한다. 지금의 이란이 아닌 자유로워질 이란 말이다."
이란 정부가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명분은 "여성이 머리카락으로 남성을 유혹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여성이 가수가 되거나 공연을 하는 건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그 때문에 이란 여성들은 가수나 연기자가 돼 무대에 오르기 위해 조국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란을 떠난 건 왜인가.
"눈을 다친 지 몇 달 뒤에 경찰이 집에 쳐들어왔다. 나와 딸이 집에 없을 때여서 체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삶이 망가졌다. 경찰이 다시 올까 두려워하며 공황 상태에 빠져 지냈다. 가족을 두고 조국을 떠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딸과 둘이서 지난 3월 튀르키예로 왔다. 독일에 망명 신청을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망명 허가가 날 때까지 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된 건가.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정권의 숨 막히는 감시를 받으며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부상자도 봐주지 않는다. 눈을 크게 다쳐 수술이 시급한 친구 한 명도 감옥에 갇혀 있다. 제발 이들을 위해 한국이 목소리를 내달라."
-튀르키예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튀르키예 역시 이슬람 국가이고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런데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자유를 누린다.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여성과 남성이 눈치 볼 필요 없이 어디든 함께 다닌다. 이란에는 왜 이런 자유와 평화가 없는지 매일 속상하다."
-튀르키예에서도 싸우고 있나.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시위를 SNS를 통해 하고 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시위를 계속할 거다. 자유로운 이란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의 어떤 좋은 나라도 이란이 아니면 나의 조국이 될 순 없다. 가족도 다시 만나야 한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환영받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메르세데는 조국을 위해 투쟁하며 삶을 재건하고 있다. 그는 운동을 가르치는 트레이너였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란와이어 홈페이지에 직접 개발한 운동 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렸다. 그는 "이란으로 돌아가 내 이름을 딴 체육관을 꼭 열겠다"고 했다.
메르세데가 전해온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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