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美명문대는 SAT 만점도 떨어뜨려… 수능 체제 바꿔야”
정부가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등 입시와 교육 개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입시는 대학 교육과 직결되는 문제다. 대학 경쟁력은 미래 인재 양성을 좌우한다. 전국 대학 총장을 연쇄 인터뷰해 입시와 대학 개혁 등 우리 교육을 근본부터 혁신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졸업장으로 죽을 때까지 대접받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며 “구글이나 테슬라는 졸업장 안 보고 능력과 경력을 보지 않나”라고 말했다. “SKY 나와도 50대 퇴직하고 노는 사람도 많은 세상”이라고 했다. 그는 ‘킬러 문항’ 한두 개 더 맞은 학생, 교수 농담까지 받아 적어 외운 학생이 평가받는 교육 시스템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고 했다.
염 총장은 지난 2015~2019년 고려대 총장으로 재임하며 신입생의 85%를 ‘심층 면접’으로 선발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시 대입의 ‘논술 전형’이 과도한 사교육을 일으킨다는 비판이 높았기 때문이다. 현재 9월 개교를 앞둔 태재대 초대 총장을 맡았다. 태재대는 캠퍼스 없이 온라인으로 토론 수업을 하며 여러 나라에서 유학하는 21세기형 혁신 대학이다.
점수 따는 기술 익히려 사교육 몰려
-고대 총장일 때 ‘심층 면접’을 확대했는데.
“당시 수시 선발은 논술이 대세였다. 자세히 보니 ‘대치동 전형’이더라. 외국 주재원 나가 있는 제자들도 방학엔 대치동 논술 학원 보내느라 허리가 휜다고들 했다. 거기서 배워온 대로 쓰니 비슷한 답이 많았다. 그래서 심층 면접으로 신입생 85%를 뽑았다. 학생 한 명당 10분 넘게 질문을 했다. 입학사정관을 2배 늘렸다. (논술이 통하지 않으니) 학원가에서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신입생을 뽑았더니 출신 학교가 700여 곳에서 1000곳 정도로 다양해졌다. 학원 못 갔던 애들도 고대에 많이 들어왔다.”
-수능 40%로 뽑는 지금 신입생은 어떤가.
“수능 점수로 줄을 세우니까 대학 서열이 생긴다. 서울대, 의대 못 가서 다른 대학에 입학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니 그들 마음속에는 ‘실패자’란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 반대로 지방 고교장 추천으로 온 애들은 대학 성적이 점점 상승한다. 대학 입장에선 후자를 뽑는 게 좋다. 국가가 대학에 자율권을 주지 않고 점수로만 뽑으라고 하니 학생들은 점수 따는 기술을 익히려고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가는 거다. 대학은 잠재력 있는 ‘원석’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사교육 시장의 문제는.
“학원 안 다니면 큰일 난다고 학부모를 ‘겁박’하고 있다. 모두를 학원으로 몰아가는 ‘피리’를 불고 있다. ‘대전 유학 중3부터’라는 말이 있다. 대치동 전세 유학은 중3부터라는 건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현상인가. 전남 목포의 여고에서 ‘꿈’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수능 비중 늘어난 거 대비하려고 토요일마다 KTX 타고 강남 학원에 가서 1박 2일 수업을 듣는다고 하더라. 사교육이 공교육 현장을 주도하고 있다. 재수학원도 문제다. 월 수백만원이 든다.예전에 ‘1차 합격자 중 포기한 학생만큼 추가 합격시키는 것보다 9월에 다시 입학시키면 안 되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면 재수 대신 반수로도 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교육부는 반대했다.”
-사교육 카르텔을 깨는 방법은.
“결국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확대하는 거다. 학교별로 전형이 다르면 사교육 시장이 일일이 대응하기 어렵다. 입시 컨설팅만 돈 벌 것이란 우려가 있는데 요즘 대입 관련 정보는 모두 무료로 온라인에 공개돼 있다. 대학마다 학생 끌어오려고 경쟁할 것이다. 이제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대입을 주도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대학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입시를 바꾼다고 효과가 있을까.
“처음 미국 유학 갔을 때 대학 교수보다 트럭 운전사가 돈을 더 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도 수입만 따지면 배달 라이더 등이 웬만한 직업보다 더 벌 수 있는 시대 아니냐. 지금 한국 사회도 학벌과 관계없이 행복하게 먹고살 수 있다. 그걸 학부모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기업이 직접 대학과 계약을 맺고 필요한 학과를 운영하거나, 온라인 대학을 열어 필요한 능력을 가르치는 시대가 오고 있다. SKY가 보증수표이던 시대는 끝났다.”
‘SKY 간판’ 대접받는 시대 이미 끝나
-한국의 대학 및 학과 서열은 공고한 측면이 있는데.
“15년 전쯤 한의대가 의대를 앞지를 것이라며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가. 한약 시장이 붕괴하면서 한의사들이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사교육 시장은 영어 안 하면 큰일 난다고 하고 ‘초등학생 의대반’까지 만들고 있다. 30년 뒤에 의대가 그렇게 좋을까.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60대 이상은 SKY 졸업장으로 먹고살았을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한국 대기업도 대규모 공개 채용보다 경력직 수시 채용을 선호한다. 구글이나 테슬라는 졸업장이 아니라 며칠씩 면접하면서 능력과 경력을 본다. ‘SKY 네트워크’라고 하지만 예전처럼 인맥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30년 전 교육받은 부모들이, 30년 후에 성공할 애들을 자기 식으로 달달 볶고 가르치려 한다.”
-대학 입시와 대학 개혁의 방향은.
“킬러 문항을 언뜻 봤더니 못 풀겠다 싶어서 읽다 포기했다. 공교육 과정 벗어난 ‘킬러 문항’ 없애는 건 시작이다. 킬러 몇 개 더 맞은 학생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공정한가. 학원에 수백만원 내고 반복 훈련한 학생에게 유리한 전형이다. 예전에 심사위원을 해보니까 학생들이 ‘경력 뻥튀기’를 많이 하더라. 10분 이상 개인 면접을 하면서 학생의 논리와 생각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하버드나 스탠퍼드는 미국 SAT(대입자격시험)에서 만점 받은 학생도 엄청 많이 떨어뜨린다. 각 학교가 원하는 인재상이 있기 때문이다. 수능은 자격 시험으로 가고, 대학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사립대엔 운영 자율권을 더 주고, 국립대 중심으로 집중 지원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자녀에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 깨야
-학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녀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부터 깨야 한다. 중국, 일본, 대만 등 저출생 국가의 공통점은 부모가 자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는 것이다. 반면 서양은 애들 인생을 본인에게 맡긴다. 지금 부모들은 영어 유치원부터 재수 학원까지 수천만~수천억원대 돈을 자식한테 쓴다. 그게 다 노후 자금이다. 지금 세대는 ‘부모한테 투자받은 것만큼 자녀한테 투자하기 어렵다’며 아이 낳기를 꺼리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점수 아닌 학생 잠재력을 평가해야
-태재대는 어떻게 신입생을 뽑고 운영하나.
“학교 등수, 수능 점수로 줄 세워 뽑지 않는다. 학생 잠재력을 평가하려 한다. 면접은 두 차례 본다. 60분간 토론 면접을 한다. 20분간 영어 지문을 읽고 학생 4명이 교수 지도 아래 40분 동안 관련 토론하는 걸 관찰한다. 그다음엔 면접관 2명이 학생 1명을 10분 이상 심층 면접한다. 1차 지원서를 받았는데 학생들이 다양하다. 대안학교 출신도 있고, 명문대 재학생도 있다. 태재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캠퍼스 없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다. 전 세계 유수 대학 교수를 초빙한다. 그러나 100분 수업 동안 교수 혼자 10분 넘게 떠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수업은 20명 미만으로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이 자기 생각과 질문을 계속 말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2학년부터는 미국, 중국, 일본 등에서 각각 한 학기씩 머무르며 공부한다. 웬만한 건 스마트폰 검색으로 다 알 수 있고, AI(인공지능)가 사람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다. 그럴수록 21세기 인재는 자기만의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
☞염재호 총장은
고려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임용돼 2015~2019년 총장을 지냈다. 2021년 ‘한국판 미네르바 대학’이라는 태재대 총장을 맡았다. 오는 9월 개교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