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 영광의 역사, 그 뒤엔 ‘반쪽의 경계인’ 있었다
‘야신’ 김성근, ‘너구리’ 장명부…
재일코리안 스포츠 영웅 열전
오시마 히로시 지음|유임하·조은애 옮김|연립서가|476쪽|2만2000원
“지면 돌아오지 말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라” “가위바위보를 해도 절대로 지면 안 된다”.
한일전(韓日戰)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시대와 종목 불문하고 이기면 영웅, 패하면 역적이 된다. 한일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각오는 배수진을 치고 전장에 나서는 병사처럼 비장하다.
한국 스포츠가 넘을 수 없던 벽처럼 여겨지던 일본을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이 도화선이 됐다. 두 대회 유치 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자양분 삼아 엘리트 스포츠가 급성장을 이뤘다. 2000년대 들어선 축구, 야구 등 인기 종목뿐 아니라 피겨와 수영 등 비인기 종목에서도 세계 최고를 배출할 만큼 ‘스포츠 선진국’이 됐다.
하지만 재일(在日) 코리안, 그리고 일본이 없었다면 한국 스포츠가 지금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일본인 프리랜서 스포츠 작가인 저자 오시마 히로시(62)가 내놓은 대답은 ‘노(NO)’다. 해방 후 혼란과 전쟁이 만들어 낸 궁핍과 폐허 속에서 한국 체육은 ‘키다리 아저씨’가 필요했고, 일본에 있는 코리안(동포와 재일 유학생 포함)들이 경제적인 지원과 함께 선수와 지도자로 한국 체육의 초석(礎石)을 다지고,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저자가 소개하는 스포츠 영웅들은 남녀와 세대, 종목을 아우른다. 일본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을 비롯해 베를린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 ‘너구리’ 장명부와 ‘그라운드의 신사’ 김일융 등 올드 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뿐 아니라 현재 국내 연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 지소연과 함께 한국 여자 축구를 강호 반열로 끌어올린 재일교포 강유미도 등장한다.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는 일방통행적 관계가 아니다. 재능 뛰어난 많은 한국인이 일본 스포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대구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간 이상백은 일본 농구의 이론을 정립해 ‘일본 농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배구에선 박계조가 일본 배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해방 후 국내 보급에 앞장섰다.
저자는 생생한 현장 취재를 통해 이들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왜 양국의 스포츠 발전과 교류에 큰 족적을 남긴 재일 한국인들이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어느 한쪽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의 한계를 이유로 꼽는다.
남북이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맞붙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에 유일하게 메달(은)을 목에 건 재일교포 선수 오승립(일본명 구레하라)이 결승에서 일본 선수에게 패하자 찬사 대신 “일본에 살고 있으니 일부러 져준 것 아니냐’는 비난이 난무한다. 한국말이 서툰 오승립은 일본말로 절규한다. “나라를 위해 정말 열심히 했다. 한국에 오면 ‘반(半)쪽발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차별은 시대를 초월한다. 추성훈이 국내의 뿌리 깊은 학연주의를 견디지 못해 일본으로 돌아간 뒤 일본 대표로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한국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자 한국 기자가 “조상의 나라에서 한국을 이긴 기분이 어떤가”라고 묻는다. 추성훈은 “나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유도 선수로 이긴 것”이라고 답한다.
저자는 1956년부터 시작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조국 방문 경기와 전국대회(봉황기) 출전이 1997년을 끝으로 막을 내린 것에 대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일부 국내 야구인의 목소리와 함께 국내 4강 대학 진학 특기생 제도 때문에 국외자로서 심판 판정 등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던 문제를 지적한다. 여전히 승리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스포츠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저자는 최근 10년간 재일 스포츠사 최대 사건으로 2021 도쿄올림픽에서 안창림이 1976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박영철 이후 45년 만에 재일교포로 메달(동)을 목에 건 것을 꼽으면서, 일본에서 외면당했던 박영철과는 달리 안창림이 고향인 교토시에서 ‘시 스포츠 최고영예상’을 받은 것에 의미를 뒀다. 그러면서 말한다.
“최근 고시엔대회에서 성적을 올린 교토 국제고는 처음은 교포 중심이었지만, 거의 전원이 일본인이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길에 필요하다면 주저함이나 고정관념 없이 행동한다. 미래의 한일관계는 이러한 젊은이들이 쌓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尹 대통령, 아태 청년 지원 'APEC 미래번영기금' 설립 제안
- “Korea’s defense industry now proposes new approaches we can learn from,” says Lockheed Martin
- “우크라전 조력자 中에 반격”...나토 항모들, 美 공백 메우러 아·태로
- 무릎 부상 장기화된 조규성, 오랜만에 전한 근황
- 박성한 역전적시타… 한국, 프리미어12 도미니카에 9대6 역전승
- “한국에서 살래요” OECD 이민증가율 2위, 그 이유는
- 연세대, ‘문제 유출 논술 합격자 발표 중지’ 가처분 결정에 이의신청
- ‘정답소녀’ 김수정,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서명…연예인 첫 공개 지지
- “이 음악 찾는데 두 달 걸렸다” 오징어게임 OST로 2등 거머쥔 피겨 선수
- “이재명 구속” vs “윤석열 퇴진”… 주말 도심서 집회로 맞붙은 보수단체·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