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수주의 본질은 헤게모니 장악 위한 知的 탐구

유석재 기자 2023. 7. 8.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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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美 보수주의자들
“미국은 유럽이 아니다” 외치며
이념 뿌리를 미국 혁명서 탐색

1945년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

조지 H. 내쉬 지음 | 서세동 옮김 | 회화나무 | 784쪽 | 5만원

‘한국의 보수는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서점 가판대를 장식한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는 좌파 필자 일색이기 일쑤다. 보수의 지적 원천은 유튜브와 태극기 집회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진보 또는 좌파 세력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는 상황은 30여 년 전 탈냉전 이후의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1990년대 이후 2020년대까지 이어진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오히려 진보 담론의 호황기와 맞물려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지적(知的)인 프레임과 흐름 자체가 뚜렷이 보이지 않으며,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빠지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반박하는 학자마저 드물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주의는 달랐다. 보수주의를 한 나라의 중요한 지적·정치적 세력으로 만든 설계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국내 번역된 보수주의 관련 저서는 일본 학자 우노 시게키의 ‘보수주의란 무엇인가’(연암서가), 영국 학자 제시 노먼의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살림) 등이 있으나, 미국의 보수주의 흐름을 자세히 분석한 번역서는 ‘1945년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이 사실상 처음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보수 연구단체인 필라델피아소사이어티 회장을 두 차례 지냈으며, 이 책은 1976년에 첫 출간된 이 분야의 권위적 저작이다.

책 제목의 1945년이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해방 정국을 ‘좌파를 추종하는 국민들이 많았던 위험한 시기’라 평가하듯,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 역시 보수주의자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서구는 좌익화됐고 인류는 집단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보수주의는 결코 인기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중앙 원형 홀에 걸린 역사화가 존 트룸벌의 ‘미국 독립선언’. 1945년 이후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 이념의 뿌리를 미국 혁명에서 탐색했다. /미국 국회의사당

그 뒤로 펼쳐진 보수주의 운동은 단순한 지적 연구가 아니라 ‘이념을 실제 정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활동’이었다. 먼저 미국 보수주의에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온 하이에크와 미제스라는 두 경제학자였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정부의 포괄적인 통제는 독재로 귀결되며 궁극적으로 자유를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한 이들의 글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념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 줬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사상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사상적·문화적 기원인 유럽을 맹신하지 않고 살부(殺父)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다. 16~17세기 근대 정치철학의 실현이라고 여겨졌던 프랑스 혁명의 전체주의적인 민주주의는 결국 마르크스와 레닌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기독교 전통의 원리를 다시 천명하고 고전 정치철학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끝내 미국 보수주의의 뿌리를 미국 자체에서 찾으려고 했다. 미국 건국 당시 나온 입헌주의, 제한된 주권, 법의 지배와 같은 신념이 더 유서 깊은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봤다. ‘작은 정부’와 ‘양도할 수 없는 재산권’은 방점을 찍는 요소였다.

이제 이들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고유의 보수주의 전통’을 찾아낸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단일한 정치 세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언론·재단·연구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자유시장 싱크탱크를 확대하며 보수주의 운동을 조직화했다. 정책 연구와 경제 프로그램이 쏟아졌다. 전쟁이 종결되던 1945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미국의 보수주의는 한 세대가 지난 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지적·정치적 운동이 됐다는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한 말은 보수적 성향을 지닌 한국 독자들이 곱씹어볼 만하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용기를 얻었던 보수주의자들은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으며 보수주의를 미국의 주류로 만들었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겐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지적 탐구의 열정과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는 끈기 있는 노력, 미래는 결코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갈고 닦은 이념이 책상머리를 벗어나 현실 정치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과연 이것들 중 무엇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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