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이념 전쟁터 된 미국 학교

조성호 기자 2023. 7.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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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성소수자 집회에서 학부모와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의 학교가 보수와 진보가 펼치는 이념 전쟁의 전장(戰場)이 되고 있다. 이번엔 학교 현장에서 청소년의 창의력 함양에 훌륭한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학생 연극’이 공격의 대상이 됐다. 연극의 스토리나 대사에 각자의 이념과 맞지 않는 부분이 등장한다고 여긴 미국 학부모들이 검열의 칼날을 꺼내 들었다. 수십년간 멀쩡히 무대에 올랐던 연극들이 비판받기 시작했고, 연극 교사들은 입맛에 맞지 않는 연극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앞서 자신들의 성향에 맞지 않는 책을 도서관에서 금서(禁書)로 지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서들을 잘라냈던 상황이 연극 무대에서 이어지는 셈이다.

검열의 난도질은 미국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 기존의 이런 항의는 좌파를 중심으로 연극의 인종 문제나 성별 문제가 과녁이었다. 뮤지컬 ‘그리스’가 1970년대의 성별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파도 싸움에 합세했다. 이들은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주인공이 남장(男裝)을 한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아이들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백인 등장인물이 없다거나, 욕설이 한 번 등장한다는 등 이유로 많은 연극이 거부당했고 교육 현장에선 ‘올릴 수 있는 연극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판이다.

금서로 지정해 달라는 책의 사례를 보면 더욱 황당하다.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소설 속 흑인에 대한 비하 표현이 인종 평등 흐름에 역행한다며 열람 금지 요청을 받았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만화 ‘마우스’는 퓰리처상을 받았음에도 욕설과 누드가 나온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올랐다.

문화 콘텐츠에 대한 이 같은 ‘시비’가 좌파 중심에서 우파로까지 확산하게 된 계기로는 지난해 3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통과시킨 ‘돈 세이 게이(Don’t Say Gay) 법’이 꼽힌다. 공립학교에서 동성애 관련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 법은 숱한 반발에도 통과됐고, 우파도 학교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말하지 마’라고 입을 막는 제목의 법안이 공공연하게 통과됐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보장해 주는 나라로 꼽힌다.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배경을 논할 때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도 표현의 자유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특정 표현을 금지하면서, 정작 이런 논란을 야기한 정치권에서는 각종 인종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발언이 난무한다. 어쩌면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는 학교를 졸업해야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어른 면허’가 된 것일까. 이 와중에 미국의 초중고등학교는 이념의 전쟁터로 갈수록 황폐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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