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말하는 ‘진짜 역도산’… “다정하고 섬세한 신사였지요”
역도산 타계 60년
다나카 여사 단독 인터뷰
“1962년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행 일본항공 여객기의 퍼스트클래스에서 역도산(力道山·일본에서는 ‘리키도잔’)을 처음 만났어요.”
지난달 30일 도쿄 고토구의 한 호텔 로비.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82)씨는 “1960년대는 외국행 비행기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고 나도 막 스튜어디스가 됐을 때”라고 술회했다. 단정한 흰머리에 1970년대식 매니큐어로 손톱을 곱게 다듬은 다나카씨는 ‘역도산’의 부인이다. 역도산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고 1950~196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설’이 된 인물이다.
“역도산에게 여느 승객에게처럼 ‘잘 부탁합니다’ 했더니, 대뜸 첫마디가 ‘아, 당신이군요’였어요.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일본항공의 주주인 데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인 역도산에게 되묻지는 못했어요.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길래 ‘술이 참 세시네요’라고 했더니, 비행기 타면 무서워서 술기운으로 잠을 자야 한다고 답했어요. 고소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요. 거구인 역도산의 솔직한 말에 깜짝 놀랐어요.”
다나카씨는 첫 만남 이듬해인 1963년, 열일곱 살 차이인 역도산과 결혼했다. 같은 해 12월 역도산은 한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젊은 야쿠자와 사소한 다툼 중에 복부를 칼에 찔렸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단순 봉합 수술이었기 때문에 의료사고 논란이 있었다. 올해는 역도산 타계 60년이다.
‘일본의 영웅’ 역도산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사후에 알려졌다. 다나카씨는 지난 60년간 재혼하지 않고 역도산의 아내로 평생을 살았다. 결혼 생활은 193일간이었지만 사랑은 부패하지 않는다. 다나카씨는 “나이 들어 많은 걸 잘 잊어버리는데, 그때 역도산을 만나 결혼하고 그를 잃어버린 기억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며 “남편이 죽고 나서, 그가 난폭한 사람이었다는 가짜 뉴스가 떠도는 걸 보면서, 딸에겐 다정하고 신사였던 아버지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청혼 직후 역도산의 눈물
국내에 번역된 ‘내 남편 역도산’(자음과모음)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어릴 적 본 TV 속 레슬러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주위 사람들은 온통 열광에 휩싸여 있었어요. ‘우리 일본이 미국을 이겼구나! 저 사람이 해냈어!’ 당시 나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역도산. 그게 그 남자의 이름이었어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2년, 나는 역도산의 청혼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박력 넘치던 사내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를 떠나 다른 방으로 가버렸어요. 역도산은 울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을 내가 훔쳐보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였어요. 그는 내 남자가 되었고 나는 그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1962년이면 역도산이 ‘도쿄에서 덴노(일왕) 다음으로 유명한 사나이’라고 불리던 시절입니다.
“저는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를 하다 스튜어디스가 된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첫 만남 이후 역도산이 가나자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역도산이 전화를 걸었다’며 가족 모두가 깜짝 놀랐죠. 일본항공 주주인 그가 홍보실을 통해 제 개인 정보를 알아낸 거예요. 그게 문제가 안 됐던 시절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첫 만남도 준비된 거였습니다. 스튜어디스가 되고 나서 하와이에서 찍은 제 컬러 사진을 엄마가 주변에 ‘맞선’ 사진으로 돌렸나 봐요. 그 사진이 역도산에게 갔고 일부러 나를 보려고 LA행 여객기 스케줄에 맞춰 탄 거예요. ‘그때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라고요.”
-역도산과는 나이 차가 꽤 있습니다만.
“당시 경찰서장이던 아버지는 그와의 교제를 반대했어요. 리키시(力士·스모 선수, 역도산은 스모를 하다가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했다)의 세계를 잘 안다며 절대 안 된다고 막았습니다. 제가 비행으로 해외에 갔을 때 역도산이 여러번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찾아왔어요. 힘든 시합을 끝내고도 밤 11시, 12시쯤 들렀대요. 한번은 아버지가 요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본인이 쓰던 미국제 연고를 가져왔어요. 아버지는 그제야 ‘진실하고 좋은 사람이니, 결혼까지는 안 되지만 교제만 한다면 괜찮다’고 승낙했어요.”
-만난 지 반년쯤 지난 1963년 1월에 약혼했지요?
“프러포즈를 받고 솔직히 고민했어요. 당시로는 흔치 않게 미국인과 결혼한 숙모가 있었는데, ‘결혼은 어차피 갬블(도박) 같은 것이고, 이렇게 좋은 사람이 청혼했다면 (거절하더라도) 빨리 답을 해주는 게 예의’라며 ‘나라면 인생을 걸고 주사위를 던져보겠다’고 조언했어요. 숙모와 함께 역도산을 만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역도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참을 안 돌아와요. 몇 분이나 지났을까. 놀라서 나가봤더니, 큰 몸집의 역도산이 등지고 선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다’는 거예요. 그날 처음 포옹하고 키스했어요.”
-당시는 한국인을 조센진이라고 비하하던 시절입니다.
“약혼하기로 하고는 ‘전처와 사이에 아이가 셋 있다’는 말을 했어요. 아이들은 다른 곳에 사는데 가끔 놀러올 테니 잘 대해달라고요. 그때까진 재일교포란 말을 못 들었어요. 지금도 기억해요. 1962년 1월 7일, TV를 보는데 불쑥 ‘나 조선에서 태어났는데 알고 있었어?’ 물어요. ‘조선인과 결혼해도 괜찮겠어?’라고요. 저는 ‘국적? 별로 상관없어요’라고 답했어요. 이튿날 역도산이 한국에 처음 방문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이었고, 한일 정치인들은 ‘일본의 영웅’인 재일교포 역도산에게 가교 역할을 기대했고, 그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공개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 전까지는 모든 신문과 방송, 책과 영화에서 역도산은 나가사키현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일본인으로 그려졌습니다. ‘일본의 영웅’이 조선인이어선 안 되니 묵인했겠지요.
“한국 사람을 ‘조센진’, 중국 사람을 ‘짱코짱코’라고 불렀죠. 소학교(초등학교) 때 30분씩 걸리던 등하굣길을 함께한 친구가 있었어요. 종종 그 친구 집에서 놀다 가곤 했는데, 다른 반 친구가 ‘왜 그 친구 집에 가냐’고 해요. 몰랐는데 조선인 부락이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왜 가면 안 되냐’고 물었어요.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그런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에요.”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역도산이 섬세하고 다정하다는 얘기는 믿기 힘들군요.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차, 결혼식 날 누가 사진기 필름 원본을 가져가버렸는데 그때는 역정을 냈어요. 질투는 딱 한 번 했지요. 스튜어디스 할 때 제가 줄곧 단발이었는데 결혼하곤 역도산이 긴 머리를 좋아해서 길렀어요. 어느 날 집으로 전화해 일하는 분한테 제가 미용실 갔다는 얘길 들었나 봐요. 저녁 때 ‘누구를 만나러 갔느냐’고 물어요. 그때 알았죠, 이 사람도 질투를 하는구나. ‘역도산이란 스타의 아내이니, 누가 봐도 단정한 용모여야 하고 긴 머리 탓에 일주일에 두 번씩 미용실에 간다’고 답했죠.”
김신락(역도산)은 모래판에서 소년 장사였다. 1938년 단오절에 스모 선수를 발굴하러 온 스카우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 선수로 출발했다. 역도산은 왜 그토록 일본인이 되기를 원했을까. 다나카씨는 책에 “그는 슬픔이 많은 사람이었다”며 “일본인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던 이면에는 조선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고 썼다.
-그는 북한 함경남도 출신인데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형님을 굉장히 만나고 싶어 했어요. 이게 역도산의 호적입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받았어요. 여기 적힌 호주가 형님이에요. 성이 ‘김’인데 (일제강점기인) 그때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죠. 이게 역도산의 본명입니다.”
다나카씨가 가리킨 호적에는 역도산의 형 이름이 김촌항락(金村恒洛)이라고 적혀 있었다. 형의 본명은 김항락이다. 호적에 역도산의 이름은 ‘광호(光浩)’였다. 사실 혼란스러운 대목이다. 역도산은 그동안 ‘김신락(金信洛)’으로 알려졌고 일본 이름이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였기 때문이다. 호적이 맞는다면 본명은 ‘김광호’였고 일본에 와서도 같은 한자를 계속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나카씨는 두 장의 흑백사진과 기념우표도 꺼냈다.
“이 사진은 북한 측에서 보내준 거예요. 역도산이 죽은 뒤에 북한에서도 가족들이 제사를 지냈다면서요. 제사를 지내는 분이 형님인 김항락일 겁니다. 이건 ‘역도산 기념우표’예요. 북한에서도 기념우표가 나올 정도로 영웅이었습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에 가서 웃통을 벗고, 북한을 향해 ‘형님!’이라고 외쳤어요. 형님에게 들리길 바라면서 목놓아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역도산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일본·한국·북한에서도 영웅
-다나카씨가 북한에 간 적은 없나요?
“몰래 간 적이 있습니다. ‘역도산에게 투지를 배웠다’는 제자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 전 참의원(국회의원)은 스승이 원했던 북한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 노력했어요. 한번은 이노키 전 참의원이 방북할 때 의원 사무실 여직원인 것처럼 제가 따라갔습니다. 북한 측에 들켜버렸지요. 역도산이 북한에 선물했다는 벤츠도 그때 봤어요.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현장 직원이 제지했다가 제가 역도산의 아내란 걸 알고는 허락해줬습니다.”
-1963년 12월, 결혼 반년 만에 역도산은 칼에 찔리는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죠. 나이트클럽에서 시비가 붙었고 칼을 맞았습니다. 첫 수술 후 의사는 ‘푹 쉬면 된다’고 했어요. 저는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역도산은 ‘하와이에 산부인과 병원을 예약했으니 아이 낳고 푹 쉬다 오자’고 했는데, 4~5일 후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졌고 재수술을 했지요. 수술실로 들어갈 때 역도산이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며 제 손을 꼭 잡았습니다.”
-사망했을 때 가짜 뉴스가 많았지요.
“정말 많았어요. 역도산이 화병의 물을 마셨다더라, 맥주를 마셨다더라,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수술한 뒤 가스가 나온 다음에야 물을 마실 수 있어요. 역도산은 갈증이 심했지만 물을 전혀 안 먹었어요. 제가 나무젓가락에 물을 묻혀 입에 대주곤 했지요. 재수술하고 나서 병실에 가보니 의사가 맥박을 재고 있었어요. 저는 늘 하던 대로 나무젓가락에 물을 묻혀 그의 입에 대는데 의사가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실신했어요. 이튿날 깨어나고야 역도산의 죽음을 실감했습니다.”
-역도산은 일본·한국·북한이 모두 기억하는 영웅입니다.
“저는 한국말 못하는데, 딸(히로미)은 한류 드라마에 푹 빠지더니 한국말도 배웠어요. 손녀는 아시아나항공에서 스튜어디스로 6~7년 일하기도 했지요. 딸을 낳고 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신사였는지 말해주고 싶었어요. 역도산은 미국에 원폭까지 맞고 패전한 일본인에게 용기를 심어준 사람입니다. 링 위에서 거구의 미국인과 싸워 이기는 모습으로요. 한국과 북한에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어떻게요?
“한국과 북한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길 바랐어요. 역도산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을 이어주고 싶어했습니다. 늘 조국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살았지요. 일본에는 ‘훌륭한 사람은 모두 재일교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분이 많아요. 한국도 일본처럼 강국의 길을 가고 있잖아요. 저도 그의 뜻을 잇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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