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인기 게임회사, 한국 문화재 되찾는데 10년간 77억원 쓴 까닭
외국 기업 라이엇게임즈
국외 문화재 환수 10년史
조선시대 유물 한 점이 프랑스의 소규모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매물로 발견됐다. 2017년 6월 7일이었다. 사진도 작았고 설명도 부정확했지만, 분명 왕실 의례에 사용된 ‘죽책’(竹冊)이었다. 외국으로 빠져나간 문화재를 되찾으려 자료를 검색하던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측은 즉시 추가 확인 절차에 착수했다. 1819년 효명세자빈 책봉 당시 수여된 죽책일 가능성이 상당했다. 김동현 부장은 “그간 불타 소실된 것으로 추정돼온 물건이었기에 놀라움이 컸다”고 말했다. 경매 마감 닷새 전인 6월 14일, 문화재청은 경매 중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급히 한 게임회사에 연락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라이엇게임즈’였다. 전 세계 이용자 1억명, 대회가 열리면 동시 시청자만 7000만명을 우습게 넘기는 명실상부 최고 인기의 전투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제작사다.경매의 경우, 며칠 내로 수억원 규모를 움직여야 하기에 절차상 국비가 쉽사리 투입되기 어려울 때가 많다.실견(實見) 및 협상을 위한 전문가 파견에만 수천만원이 필요한 긴급 상황에서 “같이 움직여줄 수 있느냐”고 이곳 한국 지사에 정부 기관이 협조를 구한 것이다. 라이엇게임즈 측은 곧장 지원 결정을 내렸다. 7월 6일 거래가 성사됐다. 죽책은 이듬해 1월 서울로 귀환했고, 지난달 20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등록됐다. 영영 무명으로 나라 밖을 떠돌 뻔한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이 지위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민간 기업이 환수를 지원한 유물이 보물로 지정된 최초의 사례다.
◇온라인 게임, 보물을 구하다
엄연히 외국 기업인 라이엇게임즈가 한국의 국외 문화재 환수를 도운 건 2013년부터다. 올해로 10년. 한국 사무실을 2011년에 열고 본격적인 시장 개척에 나서면서 특색 있는 사회 공헌 활동을 모색한 결과다. 구기향 사회환원사업 총괄은 “놀이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으로서 문화의 뿌리인 문화유산 보호에 동참키로 했다”며 “이듬해 문화재청과 접촉해 후원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이 결정에는 주고객인 어린 게이머들에게 국사(國史)를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도 담겨 있다. “역사를 시험 과목으로만 여길 뿐 일상에서 관심을 갖는 경우는 적지 않나. 게임회사가 화자(話者)가 된다면 호기심에라도 한 번 더 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첫 수확은 18세기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3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유물이다. 319×315㎝ 크기의 이 대형 불화는 그러나 1973년 버지니아주(州) 허미티지박물관에 들어간 이후, 둘둘 말린 채 40년간 수장고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소재를 파악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측이 수차례 반환을 요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불화는 하루하루 훼손되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라이엇게임즈가 3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박물관에 지원하고, 박물관은 우리나라에 불화를 기증하는 방식의 ‘3자 구도’로 재협상에 들어갔다. 그렇게 2014년 1월 ‘석가삼존도’는 고향 땅에 안겼다. 80년 만이었다.
◇“내가 게임에 쓴 돈이 문화재로”
이후 라이엇게임즈는 문화재청·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과 협력해 ‘척암선생문집 책판’(독일), ‘백자이동궁명사각호’(미국), ‘중화궁인’(미국)에 이어 지난해 ‘보록’(영국)까지 총 6점의 문화재를 되찾아왔다. 후원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을 관리처로 설정해 매년 일정액을 기탁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지금껏 누적액이 76억7000만원이다. 문화재청 장영기 사무관은 “유물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기약이 없기에 문화재 환수는 단시간에 성과를 내기 힘든 사업”이라며 “대다수 기업이 후원 참여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행보”라고 말했다. 현재 국외 문화재 환수를 지원하는 민간 기업은 라이엇게임즈가 유일하다.
현재 라이엇게임즈가 서비스하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는 국내 PC방 점유율 257주 연속 1위(게임트릭스 집계)를 달리고 있고, 항저우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는 선수는 한국인(이상혁)이다. 우리 문화·산업에 끼치는 파급력이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게임은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장르다. 골방에 틀어박힌 고립과 중독의 이미지 탓에 쉬이 사회 단절과 연결되는 탓이다. 문화재 환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그간 게임에 쓴 돈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의 환호가 나오는 이유다. 구 총괄은 “부모님 세대만 해도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깊지 않은데 최근 ‘너네 회사 좋은 일 한다더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젊은 직원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게임 애국’의 의미를 담아 2021년에는 게임 속 한국 구미호 캐릭터 ‘아리’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전달했다.
◇첨단이 전통을 지킨다
문화재 환수 외에도 고궁·왕릉 보존 지원, 성균관 및 서울 문묘 안내판 개선, 한국 서원 3D 측량 사업 지원, 미국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보수공사 지원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2년부터 열어 온 청소년 역사 캠프는 누적 참가자 5300명을 넘겼다.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보수 및 재개관 후원 등 사업 범주도 전통 문화를 넘어 다양해지고 있다. 그간의 내역만 보면 외국 게임 회사라는 게 의아할 정도다.
이런 선한 영향력은 게임 업계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온라인 게임 ‘리니지’로 유명한 한국 게임회사 엔씨소프트는 지난 3월 경북연구원과 ‘천년 신라 왕경 디지털 복원’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게임 회사의 특·장점인 시각 기술로 석굴암·첨성대·불국사 같은 신라시대 문화재 디지털 콘텐츠 제작 및 디지털 스캔 등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온라인 게임 ‘검은 사막’을 운영하는 국내 게임회사 펄어비스는 지난해 문화재청과 ‘게임을 통한 문화유산 콘텐츠 보급 확산’ 업무협약을 맺었다. 게임 속에 우리 문화유산을 담아내 자연스레 세계에 알리겠다는 것으로, 최근 조선시대 건축물 및 문화를 활용해 제작한 게임 내 새로운 세계관 ‘아침의 나라’를 공개했다.
◇포르쉐·스타벅스·에르메스도 합류
문화유산은 해외 기업이 해당 국가에 가장 깊이 녹아들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지이기도 하다. 독일 스포츠카 기업 포르쉐코리아는 최근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선물 3종(갑옷·투구·갑주함)을 재현했다. 1899년 대한제국 최초의 국빈이었던 독일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에게 건넨 선물의 일부로,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리는 특별전을 덕수궁에서 지난 2일까지 열고 완성된 공예품을 공개했다. 지난해부터는 무형문화재 계승 지원 사업에 7억46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스타벅스코리아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복원에 기금을 전달하고 올해 창경궁에 나무 1000그루를 심기로 한 것도, 명품업체 에르메스코리아가 조선시대 궁중 집기류 복원 등의 무형문화재 활성화 지원을 펼치는 것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기적 활동이 보장되려면 지역 커뮤니티와의 관계가 중요한데 전통문화는 그 주요 매개체”라며 “문화유산을 후원함으로써 기업의 상품을 ‘문화’로 바라보게 하는 효과도 얻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