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희로애락 4쿼터… 힘들어도 ‘괜찮아’ 외치면 기적이 일어난다

최인준 기자 2023. 7.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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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감독대행 4번 만에 첫 우승
KGC인삼공사 김상식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의 김상식 감독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웃고 있다. 김 감독은 지난 5월 챔프전에서 서울SK를 꺾고 생애 첫 정상 자리에 올랐다. 4번의 감독 대행, 미국 연수 등 좌절의 연속이던 농구 인생이 한 번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 한국 프로 스포츠 무대는 ‘고대 87학번’이 휩쓸다시피 하고 있다. 1987년 입학한 고려대 동기인 홍명보(체육교육과)와 염경엽(법학과)이 축구(울산 현대)와 야구(LG 트윈스)에서 각각 선두를 달린다. 최근엔 이들과 절친이자 같은 학번 출신이 농구판까지 접수하며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주인공은 안양 KGC인삼공사 김상식(55) 감독. 그는 지난 5월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에서 서울 SK를 4승 3패로 꺾고 생애 첫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홍명보·염경엽과 달리 김상식은 지도자로서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다. 홍명보는 2012년 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걸고, 지난해엔 소속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염경엽은 과거 신생팀 넥센(현 키움)을 맡아 4년 동안 3차례 구단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SK와이번스 단장으로 2018년엔 우승도 경험했다. 반면 김상식은 지도자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감독 대행만 4차례(국가대표 포함). 좀처럼 풀리지 않는 농구 인생이었다. 모든 걸 접고 아내와 제주도에 내려가 살까 고민했다.

긴 방황 끝에 그는 지난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KGC인삼공사 감독에 부임했다. 이곳에서 자신도 예상 못 한 40년 농구 인생 최고 반전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주축 선수가 빠져 중위권에 머물 것이라는 전문가 예상을 깨고 개막과 동시에 팀을 선두에 올린 것. 밟은 액셀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3월 동아시아 클럽 대항전인 EASL(동아시아 수퍼리그)에 출전해 우승한 데 이어 정규 리그 우승, 통합 우승까지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농구와 ‘헤어질 결심’까지 했었는데, 이제 동기 모임에서 우승 감독으로 어깨 힘 팍 줄 수 있게 됐습니다. 하하!”

<아무튼주말>KGC인삼공사 김상식 감독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

◇‘비운의 지도자’ 꼬리표 떼다

-첫 챔프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두 달이 지났지만 저에게 일어난 일들이 여전히 실감나지 않습니다. 잘나가던 선수 시절에도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우승이라는 영광은 남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루에 4~5개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우승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듣는 것도 굉장히 쑥스럽습니다.”

-챔프전 경험도 없는 감독이 한 시즌에 3관왕을 했습니다. 비결이라면.

“선수들에게 자율 DNA를 심으려 노력했습니다. 보통 포워드, 가드처럼 정해진 포지션에서만 경기를 하는 경향이 강한데 흐름에 따라 포지션과 관계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선수들의 농구 지능(BQ)을 높이려 했죠. 센터가 외곽으로 뛰어가기도 해야 하는 거죠. 코치 의견도 많이 들었습니다.”

-감독 대행만 4차례 했습니다.

“대행을 맡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에요. 성적이 부진하니 구단 분위기가 밝을 리 없었죠. 그때마다 선수들을 혼내는 것보다는 ‘괜찮다. 괜찮다’ 해줬습니다. 신기하게 격려를 할수록 성적이 좋아지더라고요. 모두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요?

“2008년 대구 오리온스에서 감독 대행을 하다가 처음 정식 감독이 됐는데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물러났습니다. 초반에 우승 후보 모비스, KCC를 잡고 잘나갔지만 주축 선수 부진으로 10구단 중 9위를 했죠. 매일 ‘나는 운도 따르지 않는구나’ 생각했지만 핑계로 들릴 것 같아 내색 안 했습니다.”

-농구계를 떠나려고 했죠.

“아내에게 농구에 더 이상 미련 두지 말자고 하고,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려 짐 싸들고 내려갔습니다. 열흘 정도 지내던 시점에 현 구단에서 감독 면접을 보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마지막 기회라 여겼습니다.”

-고대 동기들도 힘이 됐겠습니다.

“대학 때는 종목이 달라 가깝게 지내진 못했어요. (홍)명보와는 2003년 선수 은퇴 후 미국에 지도자 연수를 떠났을 때 한인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가족끼리 왕래할 정도로 가까워졌어요. 명보는 당시 LA 갤럭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죠. 경엽이와는 지금도 가끔 안부를 묻고요.”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각자 종목이 다르니까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고 동갑이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요. 지난달엔 응원차 울산에 내려가서 명보와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나이도 있고 젊은 감독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 정도면 꽤 선방하고 있는 거 아니겠냐. 더 파이팅하자’며 격려했죠.”

김상식 KGC인삼공사 농구단 감독이 안양 체육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선수 軍입대 배웅하는 감독님

농구 팬들 사이에서 김상식은 선수들에게 고함을 지르지 않는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알려져 있다. 코치, 선수들의 경조사까지 모두 챙길 정도. 선수 사이에서 그는 ‘식버지’(김상식+아버지)로 통한다.

-경기 때 거의 소리를 지르지 않지요.

“어린이 팬들 앞에서 프로인 선수들을 큰 소리로 윽박지르고 질책하는 건 팬과 선수 모두를 무시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별 효과도 없고요.”

-그래도 경기가 안 풀리면 화가 나지 않나요?

“저도 사람인데 속으론 욱하죠. 그런데 선수들을 다그치면 본인 플레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경기 중 실수해도 고개 숙이거나 벤치를 쳐다보지 말고 가볍게 손만 흔들어주라고 합니다.”

-모든 선수 경조사를 챙기는 이유가 있나요.

“사제지간이 아니라 가족이라 생각하고 다가가려 해요. 행동으로 보여줘야죠. 지난 2월엔 신인인 유진의 동국대 졸입식장에 갔고, 우승 직후 주축 선수인 변준형이 군 입대 할 때 논산 훈련소 앞까지 따라갔죠. 이렇게 하면 선수 부모들은 ‘우리 아들이 좋은 팀에서 뛰고 있구나’ 안심합니다. 선수도 소속감을 느끼고 더 열심히 뛰는 것 같고요.”

-처음부터 다정하게 대했나요.

“처음 감독할 땐 저도 무조건 선수를 혼내야 한다고 생각어요. 2009년 오리온스 감독에서 물러나고 NBA 우승만 11차례 한 필 잭슨 감독이 있는 미국 LA 레이커스 구단에 지도자 연수를 간 뒤 겪은 문화 충격으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어떤 충격이었나요.

“미국에선 아무도 선수를 다그치지 않았어요. 감독은 오로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죠.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무턱대고 목소리 높인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집에서도 딸에게 잔소리 거의 안 해요.(웃음)”

◇운동 반대한 농구 레전드 아버지

김상식의 아버지는 한국 농구 레전드로 꼽히는 김영기(87) 전 KBL(한국농구연맹) 총재다. 신동파와 함께 스타 선수로 활동했고, 국가대표 감독으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궜다.

김영기 전 KBL 총재. 김상식 감독의 아버지인 그는 한국 농구의 레전드로 통한다. / 김지호 기자

-우승 이후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셨겠습니다.

“아버지는 말을 길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화로 ‘수고했다. 큰일했다’ 딱 이 정도만 하셨어요. 저희 부자(父子)가 속으론 애틋하지만 표현은 잘 안 합니다(웃음).”

-그게 전부였나요?

“지난달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께서 KBL 총재 하느라 당시 구단들이 아들인 나를 감독으로 쓰기 꺼렸을 것이라고 하셨더라고요. 늘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번 우승으로 홀가분해졌다고 말씀하셨어요.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김영기는 어떤 분이셨나요.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2학년에 농구를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셨습니다. 스포츠 선수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죠. 그래도 여의도 집 근처 국민은행 여자농구단 체육관에 가끔 저를 데리고 가셔서 농구 지도를 해주셨어요.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요즘 말로 ‘츤데레’(웃음).”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웠나요?

“어려서부터 ‘김영기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선수보다 확실한 강점이 있지 않으면 후광을 본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죠. 똑같이 운동하면 인정을 못 받는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하루에 남들보다 슈팅을 200~300개 더 할 정도로 지독하게 훈련했죠.”

김상식 KGC인삼공사 농구단 감독이 안양 체육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도, 농구도 희로애락 4쿼터!

KGC 인삼공사는 올해 최고의 시즌을 보냈지만 내년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우승 주역 오세근이 SK로 이적하는 등 주축 선수 상당수가 빠졌기 때문이다.

-전력 이탈이 많은데.

“작년에 처음 구단을 맡았을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최선을 다할 뿐이죠. 팬들이 봤을 때 재밌고 이기는 농구를 하고 싶습니다.”

-1990년대와 비교하면 요즘 농구 인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과거보다는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많이 줄긴 했지만 변화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챔프전 때 SK의 전희철 감독과 ‘팬들이 더 관심을 갖도록 더 재밌는 경기를 하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도 기대 이하입니다.

“부진 이유를 꼽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미 NBA는 스피드 있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는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수비 위주로 하죠. 어느 쪽 농구가 더 강할까요.”

-선수·지도자로 40년, 코트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농구를 인생에 비유하면 희로애락이라고 생각해요. 4번의 쿼터를 치르다 보면 희로애락이 번갈아 나타나거든요. ‘희’로 경기를 시작해도 다음 쿼터에선 바로 지옥을 맛볼 수 있죠. 모든 쿼터가 희일 수도 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말자.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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