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둘 다 없애라
특혜·지지 교환 안 될 일
예술가 직접 지원보다
문화소비자 중심 혜택을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엔 10년째 소설가의 방이 있다. 서울 프린스호텔이 2014년부터 벌이고 있는 작가 레지던스 사업이다. 지금까지 윤고은 장류진 박상영 한은형 등 80명가량의 젊은 소설가들이 한 달에서 석 달씩 머물며 자신의 작품을 썼다. 5평 작은 방 앞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곳은 소설가가 집필하는 객실입니다. 조용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텔은 하루 세끼 식사와 커피를 제공하며, 작가의 보답 의무는 별도로 없다. 민간기업이 문화예술에 기여하는 참신한 방법.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줄어들었으면 하는 장면도 있다. 지난봄 한 지역 민예총(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 블랙리스트 중단하라며 기자회견과 시위를 벌였다. 시가 주관하는 민간단체 보조금 예산지원사업 공모에서 대거 탈락했는데, 이는 보수 예총(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과의 차별이자 새로운 블랙리스트라는 주장이었다. 예총이건 민예총이건 이런 장르 통합적인 예술인 단체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시대착오임은 일단 논외로 하자. 가입한 예술가조차 전체 이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 만큼 예전 같지 않은 위상의 이 단체들엔 안타깝지만, 요즘 지자체들은 지역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각자의 문화 사업을 추진하는 게 대세다. 재능과 노력을 입증하기보다, 떨어지면 블랙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염치없는 예술가들이 요즘 너무 많아졌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블랙리스트 파동을 기억한다.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배제했다면 옳지 않다. 하지만 이 명제가 놓친 근원적 질문이 있다. 앞서 인용한 프린스호텔이나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 등 민간 영역이 아닌, 국가의 예술가 개별 지원은 정당한가. 정부가 주는 창작 지원금을 받은 예술가가 이후 정부 비판을 멈췄다면 안 부끄럽나. 반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예술가가 이후 비판의 수위를 올렸다면, 그는 더 부끄러워 해야 하지 않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 설립된 문예진흥원은 태생부터 국가의 예술가 길들이기 논란을 불렀다. 2005년부터는 ‘민간자율 현장중심’이라며 문화예술위원회로 거듭났지만, 소음과 잡음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됐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블랙리스트 못지않게 예술가들의 분노와 체념을 불렀던 사안이 있다. 문재인 정권의 화이트리스트다. 시인 출신 도종환 문화부 장관을 중심으로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와 출판사 창비의 네트워크는, 그 네트워크 바깥에 있던 문인들의 냉소를 불러왔던 대표적 사례다. 국가권력과 예술단체가 특혜와 지원을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교환하는 관계라고 상상해보라. 그때 예술은 얼마나 초라한가.
나는 블랙리스트도 화이트리스트도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믿는다. 문화예술의 창달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프로젝트가 아니라 특정 개인과 단체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의 혜택과 지원은 최소화해야 한다.
이전 칼럼에서도 인용했지만, 국가가 예술을 지원하면 할수록 예술가는 가난해진다는 역설이 있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예술창작 지원 규모를 대폭 늘렸더니 예술가의 숫자가 급증했고, 반대로 예술가 한 명 한 명의 지갑은 얇아졌다는 아이러니. 늘어난 예술가만큼 예술의 수요까지 증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술가 직접 지원보다, 예술 소비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문예진흥의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정 장르와 예술가 위주로 지원하면, 지원 범위 바깥의 예술가에게는 상대적 불이익이 돌아가기 마련. 발상의 전환을 고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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