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대학 평준화,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에서 대학 평준화가 본격 제기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공동입학·공동학위제를 포함하는 ‘국립대 통합’이 처음 나왔고, 여기에 ‘공영형 사립대’를 추가한 ‘대학 네트워크’가 파생되었다. ‘입시 철폐’ 또는 ‘수능 자격고사화’도 껴 있었다. 이러한 방안들을 통해 대학서열과 과열경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것이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17년 대선 시기, 나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던 ‘국민성장’의 교육팀 일원이었다. 대학 정책은 내 소관 밖이었는데, 어느날 대학 정책을 담당하는 간사급 인물이 나를 찾아와서 물었다. “공동입학제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국립대 통합과 공동입학·공동학위제를 검토하다가 벽에 부딪힌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답은 간단했다. “그거 안 되는 거 이제야 아셨어요?”
서울대를 포함한 거점 국립대들을 통합해서 정원 3만4000명의 가칭 ‘한국대’를 만들자는 방안이 있다. 한국대에 입학한 학생이 서울 캠퍼스(현재의 서울대)에 배정될 확률은 10%도 되지 않는다. 서울시립대와 서울과학기술대를 포함해도 20%이다. 선후배 간 인맥도 끊어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연세대·고려대 정원은 4000명씩인데, 입학하면 서울에서 다니고, 선후배 인맥도 유지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학생 1인당 투입액을 살펴보면 연세대·고려대는 서울대에는 못미치지만 나머지 거점 국립대의 2배에 가깝다. 그만큼 교육의 질도 우수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대와 연세대·고려대에 동시 합격하면? 십중팔구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립대 통합은 서울대가 차지해온 1등 자리를 연세대·고려대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상의 시뮬레이션은 기존 대학 평준화론의 결함을 드러낸다.
첫 번째 결함은 ‘입학제도’의 평준화에 가려 ‘교육품질’의 평준화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대학의 교육품질은 매우 낮다. OECD 평균 연간 대학생 1인당 1만7559달러를 투입하는 반면 한국은 1만1287달러밖에 투입하지 않는다. OECD 39개국 중 32위에 그친다(2019년 기준). OECD 하위권, 선진국 중에서는 꼴찌다. 다만 등록금이 미국·일본·영국 다음으로 비싸기 때문에 착시 현상이 일어날 뿐이다. 교육품질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재정투입을 동반한 ‘상향 평준화’가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평준화론은 학벌과 서열의 토대가 곧 재정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 재정 계획이 없었다.
기존 평준화론의 두 번째 결함은 명문 사립대와의 ‘대결’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영형 사립대로의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 정부 지원을 끊자는 얘기가 버젓이 나돈다. 이쯤 되면 ‘한판 붙자’는 얘기다. 현직 국회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명문 사립대 출신인데 이게 가능할까? 프랑스에서는 68혁명 때 좌파의 요구를 우파 정부가 수용해 사립대까지 대학 평준화가 이뤄졌는데, 혁명적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일 정부 지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해나가도 문제다. 미국이 바로 그런 체제다. 비싼 등록금을 받는 명문 사립대가 최상위 그룹을 차지하고, 주립대가 그 아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명문 사립대들과 함께하는 ‘포용적’ 평준화가 필요하다. 한 가지 방안은 명문 사립대들에 매년 거액의 추가 지원금을 주는 대신 학생선발권만 넘겨받는 사회적 대타협을 하는 것이다. 그 지원금의 일부는 ‘학부 교육의 상향 평준화’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연구비에 투입하여, 세계 100위권 대학으로의 도약을 시도하도록 한다. 참고로 세계적인 대학 랭킹은 대체로 연구 성과 랭킹이다.
마지막으로 의대 등 인기 전공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난 칼럼 ‘대학 평준화의 두 가지 의미’(6월10일자)에서 설명했듯이, 교육품질의 측면에서 평준화가 이뤄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조차 인기 학과의 경우 경쟁적 선발을 한다. 노동시장의 지위 격차가 대학교육에 투영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대학 평준화로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학 1학년 또는 2학년을 마치고 선발하거나, 프랑스처럼 입학은 쉽되 진급 시 대량 탈락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아울러 서울대나 카이스트 등 최상위 연구중심 대학들에 한해 학사과정을 모집하지 않고 고3 및 대1~3 학생을 대상으로 학사·석사 통합과정만 선발하는 방법도 고려해봄직하다.
한국에서 대학 평준화는 가능하다. 고졸자의 35~40%를 수용하는 4년제 대학 ‘포용적 상향 평준화’ 시스템을 만드는 데 넉넉잡아 매년 6조원이 필요하다. 정부 예산의 1%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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