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을 추모하며

기자 2023. 7.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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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와 그 인근 공비 소굴을 소사 폭격하여 지상군을 밀접 지원하라.”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18일 오전 6시30분, 대한민국 공군 제1전투비행단 소속 4기 편대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퇴로가 막히자 낙오되어 가야산에 숨어들었고, 해인사를 은거지 삼아 활동하고 있었다. 가야산에 낙오된 공비의 수는 900여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해 민간인 피해 또한 극심했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임무를 하달받은 편대는 중무장한 채로 가야산 상공으로 이동하였다. 1번 전투기에는 네이팜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공격 표적은 대적광전 앞마당이었고, 네이팜탄 한 발만으로도 사찰 전체는 물론 팔만대장경판은 잿더미가 될 상황이었다.

편대원 모두 공비 소탕을 위한 전의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편대장의 1번기가 급상승 선회하면서 무전으로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라!”

명령에 따라 편대장 기를 필두로 하여 2·3·4번기가 뒤를 이어 급반전 급강하하면서 해인사 대적광전의 용마루를 초저공 비행으로 스치는 듯 지나쳤다. 편대는 사찰 주변을 선회하다 사찰 주변에는 기총 소사도 하지 않고, 해인사 뒷산에서 몇 개의 능선을 넘은 곳에 폭탄과 로켓탄을 발사하여 공비들을 사살하였다. 그렇게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 고려 팔만대장경은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편대의 비행 지휘관이 바로 고 김영환(金永煥) 장군(당시 대령)이다. 당시 임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김 장군에게 미 군사고문단의 고위 장교는 작전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하냐”며 문책한다.

그러자 김 장군은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하다. 공비는 일정한 전선도 없이 물러났다 침입하기를 반복하는 유동물(流動物)에 불과한데 사찰을 공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김 장군은 이에 덧붙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독일군에 순순히 항복한 사실과 영국인들이 인도를 잃더라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예를 들면서 “우리 민족도 파리와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가지고 있다. 이를 어찌 수백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급박했던 정황은 지관 스님께서 펴낸 <가야산 해인사지(誌)>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지난 7월3일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매우 특별한 추모제가 열렸다.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행사였다. 하안거에 동참한 대중 스님들은 물론 대한민국 공군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한 성대한 행사였다. 가사를 걸친 스님들과 군복을 차려입은 공군 장병들이 나란히 법당에 앉아 있는 모습은 어딘지 생소하지만, 이렇게 스님들과 공군 장병들이 모여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김영환 장군으로 인해 맺어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대한민국 공군 사이의 그 깊은 인연 때문이다. 김영환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6·25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전투기 조종사였다. 김 장군 덕분에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장경판전이 지금까지도 온전할 수 있었다.

‘화리생연(火裏生蓮).’ 불길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의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실려 있는 선시(禪詩) 중 일부이다. 김영환 장군의 고뇌에 찬 결단이야말로 전쟁이라는 증오의 불길, 폭력과 광기의 불길 속에서 이성과 인간의 고귀함을 지켜낸 ‘화리생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살육이 자행되는 전쟁터에서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인류 보편적 가치 사이에서 고뇌했을 장군을 떠올리면 절로 숙연해진다. 생사가 오가는 절박함 속에서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가 공공연히 묵인되는 현실에서 그의 희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큰 울림이 되고 있다.

김영환 장군이 지켜낸 것은 단순히 문화재가 아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숭고함과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증거를 수호한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폐허 속에서도 인간은 다시 일어섰고 다시 문명을 건설하고, 결국 야만과 폭력을 이겨낼 수 있다는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폭력보다 전쟁보다 강한 것이 있다는 사실, 야만과 광기를 결국에는 문화와 예술이 압도한다는 증거이다. 그 고귀한 이야기 속에 바로 김영환 장군이 살아 있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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