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멀티 유니버스 스파이더맨과 시대 감각
최근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를 봤다. 흑인 스파이더맨을 탄생시킨 <스파이더맨: 인투 더 스파이더버스>(2018)의 후속편이다. 새로운 서사, 그래픽, 음악, 편집으로 현대적 시대 감각을 담은 작품으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 마블 시리즈는 오랫동안 백인 남성 중심의 영웅 서사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멀티 유니버스 소재를 도입해 성, 인종, 나이, 국가, 결혼 상태 등에서 상이한 배경을 가진 스파이더맨들을 총출동시킨다. 스파이더맨의 파워도 개개인이 가진 초능력보다, 다양한 장비를 가진 스파이더맨들과의 결합에 따라 달라진다. 스파이더맨의 상징인 거미줄조차 손목에 착용하는 기술 장치에서 나온다. 악당 또한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 영화는 악당으로부터 도시를 구하려고 분투하는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스파이더맨 세계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내부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려는 아웃사이더 스파이더맨들의 연합을 그린다.
굳이 상대성 원리나 평행 우주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고유한 세상과 시간을 살고 있다. 동일한 시간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세상을 산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멀티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기술 장치 없이도, 이미 현실에는 수억만개의 다른 세상들이 공존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 쪽방의 독거노인과 미국 베벌리힐스 부촌의 독거노인의 세상은 다른 우주이다. 따라서 영화 속 멀티 유니버스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세상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시대 감각을 구축한다. 공유되는 시대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 미디어의 주요 역할이다.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면 ‘글리치(glitch) 현상’을 겪는다. 글리치 현상은 주로 전자기기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오류로, 영화에서는 스파이더맨의 몸이 찌지직거리며 파편화되는 그래픽으로 처리된다. 몸에 새겨진 시대 감각과 실제 마주하는 시대 감각 사이의 괴리를 표현한 것이다.
지난 1년간 미디어에 등장하는 일련의 (특히 정치권) 사건들을 보며 나는 종종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지?”라고 자문하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 시대’와 미디어에 등장하는 ‘다른 시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글리치 현상이다.
시대 감각은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으로 볼 수 있는데,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주로 ‘권력’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해왔다. 오래된 권력 개념은 군대와 같은 물리적 힘을 동원해 신체적 폭력을 가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예컨대, 독재자의 공포 정치). 이러한 오래된 권력 개념에 반하여, 1970~1980년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브루디외는 현대 사회의 권력을 개인이 소유한 태도, 교양, 학력, 돈, 인맥 등이 축적된 상징적 힘으로 정의하며, 다른 이들의 자발적 승인을 통해 작동한다고 주장했다(예컨대, 삼성 재벌가에 대한 한국 대중의 인정). 보다 최근에는 부르노 라투르 등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제시한 권력 개념이 지배적인 설명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권력은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결합이 가져오는 효과”라고 말한다. 즉, 어떠한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이 결합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달라진다. 이들은 권력을 개인이 소유하여 행사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탓에 수많은 독재자들이 아무도 따르지 않을 명령을 내려왔다고 비판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다양한 기술 장치와 스파이더맨들의 조합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며 현대적 시대 감각을 재현한다. 반면에 한국 정치 현실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래된 권력 개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이에서 나의 몸은 오늘도 찌지직거린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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