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소리 내어 말하는, 흰 고요

2023. 7. 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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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발화’_창덕궁, 2012년. ©정정호
배흘림기둥을 닮은 선이 하나 가로로 누워있고, 그 아래 자로 그은 듯 반듯한 선이 하나 비스듬하다. 선의 중심은 검고 주변은 희끗희끗한 것이, 날아갈 듯 붓을 놀려 붓 자국이 하얗게 드러나는 비백체(飛白體)다.

이렇듯 서화인가 싶은데 사진이라 하고, 그것도 스트레이트 사진(strait photo)이라고 한다. 사진가 정정호는 도대체 무엇을 ‘바로’ 찍어서 훌쩍 추상의 경계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일까.

보는 이에 따라 추측과 해석이 달라지는 정정호의 ‘백(白)의 발화(發話)’를 ‘얼어서 눈이 쌓인 연못의 표면’이라고 들려주면 이구동성 ‘아!’ 하는 감탄을 쏟아낸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음을 내남없이 놀라워하고,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사진가의 첫 작업이라고 하면 다시금 탄복한다. 정정호는 언 연못과 산의 능선, 언덕 위에 쌓인 눈의 형상과 얼음의 형체들로 사진 시리즈 ‘백의 발화’를 완성했다.

“힘들고, 가난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어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단순하고 선(禪)적인 것들에 시선이 갔습니다.”

‘백의 발화’ 중 하나인 이 사진은 그런 청년의 시선에 포착된, 한겨울의 창덕궁 연못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을 흑백으로 단순히 표현했음에도, 사진이 전하는 감각의 너비와 사유의 깊이는 인화지의 크기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듯이 시리즈 ‘백의 발화’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사진 페스티벌 중 하나인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트’의 운영진들을 매료시켰고, 2015년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 5개 대륙에서 신진작가를 찾아내 전시로 세상에 내보이는 ‘인터내셔널 디스커버리 5’에 선정돼 휴스턴에서 전 세계 관람객을 맞았다.

그에 힘입었음인지 아니면 전부터 힘들었으므로 더이상 힘들어하지 않게 된 것인지, 정정호는 ‘전업 작가’로 국내외 레지던시에 지속적으로 상주하며 여전히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신화와 민간 설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시각화해서 지금 시대에 맞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다음 달 교환 작가 레지던시 입주를 위해 독일로 떠나는 사진가 정정호의 다음 ‘발화’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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