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순종실록, 1만여 종 공문서 자료 빼 일제 통치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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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일제 식민주의가 남긴 멍에 〈하〉
고종 시대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대립하기도 하여 혼란스럽다. 필자처럼 긍정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대표적인 실패의 역사로 보는 견해와 해석도 많다. 필자는 국왕의 위상이 바닥으로 실추한 상황을 그대로 두는 것은 곧 머리 없는 역사로서 바른 역사상이 될 수 없다는 견지에서 고종과 그 정부의 치적을 새롭게 주목하는 것일 뿐인데 국왕 중심 역사관이란 소리를 듣는다. 한국 근대사,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학문으로서의 요건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실록』 영인본 덕에 60년대 ‘국학 붐’
1945년 광복 후 1960년대 후반에 ‘국학 붐’이 일어났다. 대학교 제도가 안정을 찾으면서 일제 식민주의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다. 이때 근·현대사 분야에서 위 두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학 붐’도 초기에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위 두 책의 영향으로 근대사 연구자들 다수가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썼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사학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류로서 그것이 근대 역사학의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구미의 근대 역사학은 흔히 “과거를 평가하려고 하기 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n)’를 먼저 밝히라”라는 랑케의 명언으로 대변된다. 과학으로서 역사학은 곧 근거 있는 역사의 서술로서 사료 편찬 작업이 필수라는 뜻이다. 우리의 ‘근대’에는 그런 기초를 닦을 시간이 없었으며 이 결함을 채울 때까지 학문으로서의 한국 근대사를 말하기 어렵다.
필자가 1990년대 초 서울대 ‘규장각 도서’ 관리 책임자로 소규모 견학단을 인솔해 일본 도쿄대학의 ‘사료편찬소’를 공식 방문하였다. 그때 국제부장직의 교수가 8층 건물의 자료 보관실을 위층에서 아래로 안내해 주었다. 4층인가 『대마도종가문서』와 영인본 『조선왕조실록』이 함께 비치되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필자는 일본 교수에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저 종가문서와 같은 1차 문서자료가 많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씀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오히려 『실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1869년 창설 후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1차 문서자료를 가져와서 뒤늦게 일본식 『실록』을 편찬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당황스러움과 감격을 동시에 느꼈다. 제집의 보석 귀한 줄을 제대로 깨닫는 견학이었다.
일본 비중 높이고, 미국과의 기록 축소
그렇다! 저 독일의 랑케 사학도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Historical Monuments of the Germans, 1826~)』 편찬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제1차 세계대전 후 구미 인문학계는 1920년 국제연맹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국제학술원 연합(UAI)을 창설하여 인류 평화 공존에 이바지하는 인문학을 표방하여 ‘문명’ 연구를 제일 과제로 삼았다. 그리스-로마, 비잔틴, 이슬람, 게르만 등 문명권 상호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해 연구에 필요한 문명권 관련 자료 편찬사업을 지원 과제(Patronized Project)로 삼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편찬사업이 각 회원국 학술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속에서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이 나오고 아놀드 토인비의 ‘문명 사학’이 출현하였다.
미국은 국제연맹과 국제학술원연합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서도 상원이 국제연맹 가입을 허용하지 않아 정작 회원국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 역사학은 그래서 유럽 역사학에 뒤지는 형세를 면치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규모 전사(戰史) 편찬사업을 일으켜 사료를 다루는 전문 인력을 대폭 양성하고 연구력을 갱신하여 유럽 역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어느 것이나 사료 편찬을 거치지 않은 역사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두 『실록』 편찬사업은 고종 시대 국제 관계에서 일본의 비중을 높이고, 조선이 중시한 미국과의 수교 기록은 의도적으로 줄였다. 1882년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하여 이루어진 왕궁 내 전기 시설 관련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1898년 황실 자금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콜브란-보스트윅사 기술제휴로 서울 시내에 전기를 시설하고 전차를 달리게 한 엄청난 근대화 사업도 전차에 사람이 치인 사고 기사에 세주(細註)로만 설립 사실을 간단히 밝혔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정부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여 황제가 침략행위에 앞장선 일본 군인과 관리에게 손수 훈장을 내린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두 『실록』은 이에 관한 기록을 빠짐없이 실어 국가 원수가 저들의 활동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남겼다. 두 『실록』 편찬사업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이 편찬사업이 정작 고종 시대 근대화 사업 추진 중에 생산된 정부 공문서 1만10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실을 밝혔다.(중앙일보 2022년 7월 11일자 14면) 두 『실록』 편찬사업은 후세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튼튼한 골조 구축 작업이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실록』의 온라인 제공에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미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본까지 갖추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 비전공자를 상대로 양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제가 고의로 제외한 정부 공문서 자료를 모두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료 편찬사업만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필자 사정으로 이번 주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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