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가량 교사생활 이상욱, 재료 직접 만들어 석판화 선도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이상욱은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1942년 도쿄로 갔다.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녔다. 이상욱은 미술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도쿄에 있던 몇 개의 미술학교가 폐교되었다. 가와바타 미술학교도 그 중 하나였다. 이듬해 이상욱은 함흥으로 귀환한다. 해방을 함흥에서 맞았다. 1946년 소련군에 항거하는 학생데모가 있었다. 이때 그는 흥분한 어린 학생들의 안전을 강구하는 교사의 신분이었다.
미 신시내티 미술관 등서 작품 소장
이상욱은 1946년 동향의 친구 권봉주의 사촌 권정희와 약혼했다. 두 사람은 약혼 상태에서 월남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2월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3월에 드디어 월남에 성공하여 이상욱의 부모가 먼저 터를 마련한 서울 인사동에 정착할 수가 있었다. 그해 가을 서대문구 충정로 2가 57번지에 자택을 마련했다. 그 집이 평생의 보금자리이자 아틀리에가 되었다.
이상욱은 부친의 희망대로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단국대 정치법학과에 편입하여 고시 공부를 하면서 창작생활을 이어나갔다. 1949년 제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부인 권정희는 명동 YWCA의 양재교사로 일했다. 이상욱은 정동 이화여고 정문 앞에 나가 권정희의 퇴근을 기다렸다. 서울우유 직매소가 그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전쟁이 터졌다. 이상욱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 숨어지냈다. 9·28 서울수복을 며칠 앞두고 인사동의 부친이 피살되었다. 북진일로의 전세가 불리하게 바뀌자 이번에는 피난을 가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이미 어린 딸 둘이 있었다. 4인 가족은 대구, 부산 등지를 오가며 피난생활을 했다. 이상욱은 대구에서 미군들의 퀀셋 건물을 짓는 일로 제법 돈을 벌었다. 덕분에 궁색은 면할 수가 있었다. 이들이 완전히 서대문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54년이었다.
부인 권정희는 휘문고등학교와 가까운 덕성여대에 의상학 강의를 나갔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퇴근길에는 극장도 찾았다. 권정희는 싱거 재봉틀 하나로 온 가족의 옷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옷은 물론 남편의 양복과 넥타이까지, 세계 유일무이의 의상을 창작했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가 창립했다. 이상욱·김정자·박성삼·유강렬·이규호·이항성·임직순·장리석·전상범·정규·차욱·최덕휴 등이 회원이었다. 1968년에는 한국판화협회를 탈퇴한 이상욱·유강렬·최영림 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창립했다, 여기에 김정자·전성우·강환섭·김상유·김훈·배륭·서승원·김종학·김민자·윤명로 등이 가세했다.
이상욱에게는 늘 ‘판화가 이상욱’이란 명칭이 따라다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판화가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뉴미디어로 인식되었다. 해외항공 운송료가 매우 비싼 시절이었다. 조각은 물론이고 회화작품도 운반하기가 힘들었다. 몇 장 포개어도 무게가 가벼운 판화는 해외교류에 유리했다. 이상욱은 이례적으로 해외전을 가졌고 해외 미술관에 다수의 작품소장 기록도 남겼다. 1958년 미국 신시내티 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다색석판화 비엔날레’에 석판화 작품 ‘겨울’을 출품했는데, 신시내티 미술관이 매입하여 소장하였다. 이를 필두로 미네소타 주립대학, 댈러스 미술관, 밀라노 미술관, 와이즈만 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었다.
부인 권정희는 화가 권옥연(1923~2011)과 가까운 인척이었다. 요란한 동작에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던 권옥연은 권정희를 누나라고 크게 부르며 서울 충정로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권옥연의 구촌 아저씨인 조각가 권진규(1922~1973)도 충정로 집을 자주 찾았다. 화가 권옥연, 이세득, 김흥수, 조각가 권진규 이들은 다 함흥 출신이었다. 이상욱 부부는 손님을 맞아 음식 차리는 걸 기뻐했다.
이상욱은 맛이 슴슴한 이북음식을 좋아했다. 부인은 간장게장을 자주 했다. 꽃게가 아닌 털게 간장게장이었다. 예전에는 겨울이 되면 서울에서 털게를 많이 팔았다. 꽃게는 다리가 길고 껍질이 단단하지만 털게는 몸통이 크고 껍질이 얇고 연하다. 게장으로 담그면 껍질까지 다 씹어 먹을 수가 있었다. 마포나루의 생선 상인들은 생선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아현동 고개를 넘어 서대문까지 왔다. 가자미, 도루묵 등을 사다가 요리를 했다. 무, 감자를 넣은 국물이 넉넉한 참가자미 찌개가 별미였다. 도루묵구이는 암놈보다는 숫놈이 더 좋다. 풍로 위의 석쇠에 도루묵을 올려 먼저 초벌구이를 한다. 이놈을 세워서 등을 살짝 누르면 짜부라들면서 배가 볼록해진다. 이때 꽁지를 잡아당기면 몸통 속의 뼈가 쏙 빠진다. 그 빈틈에 간장으로 양념을 한 쪽파와 마늘을 넣어 다시 석쇠에 올려 굽는다.
촌부처럼 소탈, 후배들과 격의 없어
이상욱은 마지막 전시회를 1987년 12월 현대화랑에서 가졌다. 판화전이었다. 대장암의 병세가 심해졌지만 그는 전시를 강행했다. 이 무렵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사무실은 신촌시장(현재의 현대백화점 자리) 근처 신보건약국 2층 김태호(1948~2022)의 화실에 있었다. 이 화실에는 프레스기를 갖춘 판화공방이 있었다. 프린터 윤인근,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총무인 화가 손철호가 이 공간의 지킴이였다. 이상욱은 여길 자주 찾았다. 언제나 한 손에는 신촌시장 노점에서 산 파전, 녹두전 등 부침개 담은 비닐봉지를, 한 손에는 막걸리병을 쥐고 있었다. 2층 화실에서 소박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상욱은 시골 촌부처럼 소탈했다. 후배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현대화랑의 판화전은 성공적이었다. 화가 서승원·강국진·김태호·김형대·유영국·사진가 임응식·조각가 이일영·김정자·문공부장관 정한모 등 수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그를 찾았다. 사실은 모두가 그의 병세가 위중함을 알았기에 생전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러 왔는지도 모른다. 이상욱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듬해 4월 이승을 떠났다. 이상욱 타계 1주기를 맞아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회원들의 성의를 모아 경기도 광주 오포면 매포리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다. 검은 오석에 전서체로 새겨진 비명은 ‘판화가 이상욱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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