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까불 지진 파마, 억눌렸던 여성의 욕망을 깨우다

2023. 7. 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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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신식 헤어스타일 유행
‘머리털을 까불까불 지지고 틀고 빗꼬아 매고 하는 소위 파마넨트란 괴상한 양머리’가 20세기 초반 들어 대중의 관심 과녁으로 떠올랐다.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 여성들의 새 머리 스타일 ‘파마’가 등장하면서다.

이 머리꼴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었다. 머리 모양새를 두고 벌인 소비 양식의 단순 전환도 아니었다. 좀 거창하게 이르자면 ‘서구 지향의 가치와 전통사회 관습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서울 거리에 파마머리를 한 일본 여성이 선을 보이는가 싶더니, 1933년에는 종로 복판에 조선인 자본이 세운 화신백화점에 오엽주라는 여성이 세운 ‘화신 미용부’가 선을 보이면서 파마라는 여성들의 머리 양식이 유행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최신 유행 이끈 ‘모던 걸’ 오엽주가 운영

오엽주라는 신여성이 설립한 최초의 미용실인 ‘화신 미용부’에서 고객이 파마를 하고 있다. 당시 파마는 ‘괴상한 양머리’ ‘경박한 외국 풍습의 천박한 본뜨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앙포토],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단정하게 빗어 넘겨 묶은 머리에 비녀를 질렀던 전통과 관습의 여성 머리는 ‘지지고, 틀고, 비꼬아 매는’ 파마머리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었다. 남성들에 비해 전통과 관습으로 더 오래, 더 무겁게 눌렸던 여성들이 문물과 제도의 개방적 흐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은 이 시기에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파마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되던 규범을 파괴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아울러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여성들의 거부행위로 비쳤다. 돈을 내고 아름다움을 사들이는 여성들의 소비 패턴은 미용실이라는 ‘장소’와 함께 번져갔다. 조선의 땅에 미용실이라는 곳이 처음 들어온 때는 1920년대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경성(京城)이라고 불렸던 당시의 서울 명동 인근에 등장한 미용실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소유였고, 고객 또한 일본인이었다.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 또는 조지야백화점과 달리 조선인이 설계하고 경영한 최초의 ‘우리’ 백화점이었다. 말하자면 최초의 ‘민족 백화점’이었다.

웬만한 소비품을 한데 모아 판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백화점(百貨店)’이라고 부르는 이 ‘장소’ 또한 근대의 상징을 이루는 곳이다. 우리 자본에 의해 세워진 백화점에 들어선 오엽주의 ‘화신 미용부’는 근대를 상징하는 뚜렷한 표지였던 백화점이라는 공간 위에서 개화기 여성들의 격렬한 ‘근대 반응’이 겹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화신 미용부는 파마, 세팅, 매니큐어, 신부 화장 등을 했으며 항상 더운물이 나오고 드라이어가 있는 최신 시설로 가득했다. 내부 공간 역시 고급스럽고 경대와 소파 등으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 화신 미용부를 운영했던 오엽주는 ‘최신’의 유행을 선도하던 장안의 유명인이었다. 그녀는 고무신에 한복이 아닌 하이힐에 양장을 하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쌍꺼풀 수술을 통해 미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당대 모던 걸의 상징 자체였다.

그러나 당시 파마는 누구나 할 수 없었다. 파마 비용은 5원 정도였는데, 이는 금가락지 하나 값과 비슷할 정도로 매우 높은 가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최신’ ‘유행’ ‘금가락지’ 등과 같은 표상들과 얽혀 있었던 파마는 영화배우·기생·신여성·상류층 등 부유한 계층 사이에서 향유되는 새로운 소비문화이자 패션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던 이들이 선보였던 파마는 근대성의 상징이었으며, 새 계급 구분의 수단이었다. 또 이는 이후 근대적 미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모던 걸의 패션이자 유행이었던 파마는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비쳤을까. 미적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신여성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던 사회에서 ‘불온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유행하는 패션이라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전기나 불에 지지는 여성의 행위가 너그럽게 받아들여졌을 리 없었다. 당시 한 신문 기사에 실린 사회의 시선이다.

미용실 방문, 혼례 준비 절차로 자리잡아

오엽주 미용원 광고 사진. [중앙포토],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신식 여자들이 머리털을 까불까불 지지고 틀고 빗꼬아 매고 하는 소위 파마넨트란 괴상한 양머리 이런 것이 온 국민정신에 위반되는 부허하고 경박한 외국 풍습의 천박한 본뜨기라고 한동안 금하리라고 하자 그 짓을 질겨하던 신여성들은 새둥지가튼 머리를 다시 못하게되는가 해서 얼떨해 하는 한편에 저 꼴을 못하게 하면 저들이 또 머리를 가지고 어떤 짓을 할까하고 구경삼아 파마넨트의 운명을 궁금히 생각하는 사람이 또 많았는데…새둥지머리가 이러케까지 이야기꺼리가 되리라구야 이게 오늘 세상인가.’(색연필, 『조선일보』 1939년 9월 4일)

당시 전기로 지진다고 하여 전발(電髮)이라고도 불렸던 파마는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다. 이처럼 파마를 한 여성에 대한 인식과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또 파마는 신여성들의 다른 규범 파괴 행위인 ‘자유연애’를 상징했다. 그래서 파마를 하면 “바람난다”는 식의 인식이 지배했다.

이러한 담론 속에서 여성은 가부장적 규범이 강요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제력을 잃고 더 많은 소유물을 축적하기 위해 돈을 낭비하는 존재로, 즉 성적 무절제와 경제적 무절제가 결합된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 안에 1933년 ‘화신 미용부’가 문을 열었다. 사진은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주변의 거리 풍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파마는 높은 가격과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평범한 여성들이 누리기가 어려웠다. 당시 여성들이 파마를 하려면 집안의 어른들과 남편의 승낙이 있어야만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파마는 여성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를 금지하려는 사회의 움직임과 여성의 욕망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미적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고도의 전략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 전략은 바로 혼례에서 수행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이 머리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혼례의 과정에서만 가능했다. 혼례를 치르면서 여성은 ‘기혼’임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시절 길게 땋았던 댕기머리를 말아 올려 비녀를 찔렀다. 머리모양의 변화는 곧 존재의 변환을 알리는 ‘기호’였다. 그리고 전통적 관습이 강요되는 사회 속에서 이 변환의 기호는 파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겼다. 즉 혼례의 이러한 절차는 여성 주체의 미적 취향을 관철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마가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파마를 했다가도 어른들 눈치에 다시 비녀를 찌르기도 했고, 시집와서 몇 년 동안은 비녀를 찌르고 있다가 어른들과 남편을 겨우 설득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파마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집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몰래 파마했다가 한동안 이를 숨기려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했다.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그토록 원하던 파마를 했지만, 막상 하고 나니 부끄럽게 느껴져 어른들 눈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이처럼 과도기에 파마는 혼례를 치른 여성들 사이에서나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런 시기를 거쳐 기혼여성이 파마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자 혼례 준비를 위해 미용실에 가는 것은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 이제 비녀를 한 여성은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치부됐고, 파마를 한 채 시집을 온 여성이 신세대로 여겨졌다.

여성 주체들이 결혼이라는 ‘의례’에 파마를 얹은 것은 근대적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기획이자 전략이었다. 이전과 다른 문화적 배경, 서구 근대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지닌 세대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문화양식인 혼례에 근대적 소비문화의 하나인 파마를 한 데 섞은 셈이었다. 이로 인해 신여성 혹은 모던 걸 등 근대적 인물을 상징했던 파마는 기혼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수월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공다해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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