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신숙주와 해동제국기

2023. 7. 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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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행의 경험, 왕명으로 편찬
조선시대 對日외교 지침서 역할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해외를 찾는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 해외여행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갈망이 분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한·일 관계가 크게 회복되고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일본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여행기를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 일본을 다녀온 후 체계적으로 여행기를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 신숙주(申叔舟:1417~1475)이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병마에 시달리다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족들도 긴 여행을 우려했으나, 신숙주는 흔쾌히 왕명을 받들었다. 26세 신숙주의 당시 직책은 서장관(書狀官)으로, 통신정사(通信正使)와 부사(副使)에 이어 서열 3위였다. 서장관은 외교와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으로, 세종은 집현전 학자 신숙주에게 큰 믿음을 보였다.

신숙주 일행은 7개월 만에 외교적 목적을 무사히 달성하고 돌아왔다. 특히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약조는 외교 현안이던 세견선(歲遣船: 일본이 해마다 조선에 보내는 배)과 세사미두(歲賜米豆: 해마다 바치는 쌀) 문제를 각각 50척, 200섬으로 해결한 성과였다. 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일본인들에게 즉석에서 시를 써주어 감탄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일본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목판본 지도로,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지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식의 독특한 파도 무늬가 바다에 그려져 있는 것이 주목된다. 신숙주는 특히 일본의 풍속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중략)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을 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는 기록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의 모습과 함께 젓가락만 사용하는 문화가 신숙주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음을 볼 수가 있다. 이어서 남녀의 모습을 묘사한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었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는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이를 검게 물들였다.” 일본식 가옥과 차를 즐기는 문화에 대한 내용도 자세하다. “집들은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다만 천황과 국왕이 사는 곳과 사원에는 기와를 사용하였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어 차를 팔게 되니 길 가는 사람이 돈 한 푼을 주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그리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나라 문자를 익히며,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는 기록을 통해서는 신숙주가 일본인들의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했음과 함께 15세기 일본의 풍속 중 많은 부분이 현대의 일본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 대한 기록인 ‘유구국기(琉球國記)’에서는 먼저 “유구국이 우리나라와 거리가 가장 멀어 그 상세한 것을 규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조빙(朝聘) 및 명호(名號)의 차례만을 기록하여 후일의 고증을 기대한다”고 하여, 유구국에 대해서는 후대의 자료를 참조할 것을 지적했다. 이어 유구국의 특산물로 유황을 소개하고 해상무역이 발달했다는 것, 남녀의 의복은 일본과 대동소이하다는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온 지 28년 만인 1471년(성종 2) 겨울에 왕명으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신숙주가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해동제국기는 일본에 대한 외교와 여행의 지침서로 자리를 잡아 갔다. 후대에 일본을 찾는 조선통신사들의 필수 목록에 해동제국기가 꼭 들어가 있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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