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딛고 우뚝 선 ‘재일코리안 스포츠인’의 삶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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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면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한·일 양국의 스포츠 문화를 취재해온 전문 르포라이터인 작가는 야구, 축구, 유도, 레슬링, 농구, 배구, 마라톤, 골프, 피겨스케이팅 등 종목별로 감동적인 재일코리안 스포츠인들의 삶을 추적해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하며 흥미진진한 영웅 열전으로 묶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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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코리안 스포츠 영웅 열전/오시마 히로시/유임하·조은혜 옮김/연립서가/2만2000원
재일동포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면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설적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필두로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3000안타를 기록한 장훈, 한국에서 ‘야신’의 지위를 얻은 김성근 감독, 한국 프로야구 전무후무한 30승 투수 장명부, 축구의 정대세, 그리고 유도와 격투기에 이어 엔터테인먼트 영역까지 맹활약 중인 추성훈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재일코리안들은 한국 스포츠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1950년대 최초로 열리는 한·일전 축구를 앞두고 있었던 모금활동에는 프로레슬러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역도산을 비롯해 신격호 같은 재일 기업인들은 물론 많은 교포가 자금을 댔다. 한국에 방문한 재일코리안 선수단이 지니고 있던 스포츠용품은 한국의 스포츠계에서는 아주 귀중한 것들이었다. 또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재일코리안들이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어 갈등도 심했지만 ‘재일 전코리아’ 선발팀이 결성되는 등 스포츠 세계에서는 같은 민족으로서 교류도 활발했다.
다만 1960년대가 되면서 북한으로 귀환하는 북송이 시작되고 한·일 국교 정상화 등으로 긴장의 시대를 맞았고 재일코리안 스포츠인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1970년대 북한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 등장하면서 남북한 대결구도가 형성되면서 전력강화가 필요했던 한국은 재일코리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9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일 스포츠 전력의 역전이 일어나면서 재일코리안들의 위상도 달라졌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 귀화하는 선수들 가운데서는 축구 선수 이충성처럼 본명 그대로 일본 국적을 선택하는 일도 나온다. 이는 재일코리안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한 결과이기도 했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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