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
정일권 당시 육참총장이 후에 6사단장을 맡은 장도영 장군에게 들은 것이라며 소개한 압록강 첫 도달 장면이었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였다.
국군 6사단 7연대 장병들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경.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병사의 사진 한 장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상징했다. 그날 밤 장병들은 초산에서 밤을 지내며 ‘가거라 38선’ 등 노래를 불렀다. 6사단은 매년 ‘압록강 진격 기념식’도 갖는다. 하지만 ‘압록강 수통’의 기쁨은 다음날부터 참혹한 패전과 후퇴로 이어졌다. 중공군은 깊숙이 들어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내달은 맥아더의 유엔군은 중국 만주폭격까지 고민했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꽁무니를 빼듯 후퇴해야 했다.
● ‘인천상륙 성공 여세 몰아 38선 돌파’
“미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군 패망이지 단순히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부터 이런 결의로 한국에 온 맥아더에게 서울 탈환 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김계동 132쪽). 맥아더와 많은 부분 견해를 달리했던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8월 하순 상륙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을지 말지 논란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했다. 군대 움직임은 측량사가 설정한 선을 따라 진격하고 정지할 수 없으며 실제 군사 상황에 맞게 목표는 다시 설정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애치슨, 577쪽)
미 합참은 서울 탈환 하루 전인 9월 27일 “‘38선 이북에서 지상작전을 해도 좋다. 단 어떤 부대도 중국과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다. 한국군 이외의 군대를 만주 국경에 진격시켜서도 안된다”고 했다. 맥아더는 38선을 넘은 뒤 작전 반경에 많은 제한을 두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 이승만 “북진하라!” 국군에 친필 명령
“대한민국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라”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부산 경무대에서 군 지휘관을 소집, 비록 작전지휘권은 7월 유엔군에 넘겼지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친필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북진 논란에 “도둑을 쫓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만두라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정일권, 156쪽)
김백일 1군단장은 10월 1일 오전 북진명령을 내렸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은 국군의 날로 정해졌다.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이 38선을 넘은 뒤 원산 입성을 두고 선두 경쟁을 벌여 10일 오전 거의 동시에 원산을 탈환했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올라온 미 8군을 오산에서 랑데뷰한 미 10군단은 다시 인천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한반도를 돌아 원산에 상륙하도록 했다.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은 멀리 남해안을 돌아온데다 원산 앞바다에 부설해 놓은 3천여기의 기뢰를 제거하느라 1주일 가량을 원산과 울릉도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전투없이 행정처리 하듯 상륙)’했다. 미군들은 원산 앞바다에서 요요작전을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러스, 38쪽) 미 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지 않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10월 28일 이원에 상륙했다.
● 지형 고려 안한 북진 목표 ‘신 맥아더 라인’
백선엽의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입성 경쟁을 벌였다. 차량을 이용한 미군이 하루 18km 진격한 반면, 1사단은 도보로 하루 25km를 올라가 10월 19일 정오 1사단이 먼저 평양 시내에 들어갔다. 백선엽은 당초 평양 진공 계획에 유엔군만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평양이 고향이다’며 밀번 미 1군단장을 설득해 평양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평양 진입 다음날 평양 북쪽 숙천, 순천 등에 미 187공수연대 4000여명을 투입하는 공수작전이 실시됐다. 하늘이 낙하산으로 시꺼멓게 덮였다. 퇴로를 차단한 뒤 포로와 납치 인사 구출, 도주하는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 포획 등이 작전 목표였다. 1만5천명으로 예상했던 북한군은 이미 청천강을 건너 38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김일성은 1주일 여 전 빠져나간 뒤였다.
공수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비행기를 타고 낙하 현장 상공에서 지켜봤다. 맥아더를 수행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맥아더의 대담함과 용기, 작전의 시의적절함, 조직력, 행동 등 다시 한 번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10월 20일자 일기).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인파가 모인 평양시민환영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 점령 후 맥아더 사령관은 새로운 북진 목표로 가까운 곳은 압록강까지 60km 가량 남겨놓은 선천~성진을 잇는 ‘뉴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38선을 넘은 직후 제시한 정주~영원~함흥을 잇는 ‘맥아더 라인’보다 30~110km 위다. 문제는 지형 검토없이 북진 목표만 올린 것이다. 한반도 지형에서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방어 폭은 270km 가량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에 가까워지면 방어 폭은 765km로 3배 이상 길어진다.(백선엽 1권, 107쪽)
● 전황 낙관과 오판
평양 탈환 이후 미 제1 기병사단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약 반납 지시도 있었다. 평양 탈환 사흘 후인 10월 22일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에게 “20일 이후 한국에 도착하는 탄약 수송선을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105mm와 155mm 포탄을 심은 함선 6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했다. 미 2사단장은 10월 25일 참모 회의에서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귀국길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핼버스탬, 34쪽).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가 얼마나 전황을 (터무니없이) 낙관했는지 기록없이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저항은 추수감사절까지 분쇄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다. 미 2개 사단과 유엔군 다른 부대들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한국에 주둔시키겠다. 빠르면 이듬해(1951년) 1월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트루먼, 342쪽). 낙동강 방어선에서 쫓겨 올라온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을 못하고 중공군 참전이 확인되기 직전 ‘폭풍 전야’ 같은 시기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었다.
● 지휘권 2원화로 동서부 전선 ‘80km 빈틈’
“시속 125마일 속도로 상륙함대 쪽으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가 동쪽으로 비켜가 운명의 여신은 맥아더의 편이었다. 인천에서는 큰 행운이 있었지만 압록강으로의 진격이라는 불가능한 기회로 나아가게 됐다.”
애치슨은 인천 상륙이후 맥아더의 ‘과속 북진’ 우려를 이렇게 나타냈다. 실제로 38선을 넘은 맥아더는 전략 전술 작전 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실책 혹은 아쉬움을 남기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특히 북진 작전 지휘권 2원화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서부전선은 워커의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은 상륙작전을 수행한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으로 나눴다. 10군단은 도쿄사령부 직속으로 두었다. 상륙작전을 반대한 워커에게서 10군단을 떼어내 지휘권을 둘로 나누고 북진 경쟁을 유도했다.
워커는 전선 시찰을 나온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같은 전선에 두 명의 지휘관이 있을 수 없다. 나를 택하든 아몬드를 택하든 하라”고 사실상 항명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12월 3일의 일이다.(정일권 143쪽). 미 10군단은 장진호 전투 이후 리지웨이가 8군 예하로 통합했다.
지휘가 2원화돼 동서부 전선에 약 80〜100km의 틈이 벌어졌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쪽 지형 때문에 통신도 안되는 등 서로 경쟁적으로 북진하던 8군과 10군단 사이에 소통이 안됐다. 애치슨은 “중간에 큰 공간이 생겨 측면이 적군에게 노출됐는데 도쿄 사령부는 30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수되는 정보를 기초로 조정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애치슨, 603쪽).
심각한 것은 중공군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이징(北京)이 10월 21일 지원군사령부에 보낸 전보에서 “미국과 국군은 지원군(중공군 의미)이 참전하리라 생각을 못하고 감히 동서 두 길로 나뉘어 마음 놓고 전진하고 있다”며 전선 사이를 파고들어 적을 나누어 포위한 뒤 각개 격파할 좋은 기회라고 지시했다.(훙쉐즈, 80쪽)
● 정보부족, 위험신호 무시, 안일한 자세
평양 탈환 후 북진하던 제1기병사단 8연대의 허버트 밀러 중사는 운산에서 늙은 농부를 만났다. “중공군 수천 명이 있으며 상당수가 말을 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농부를 대대까지 데려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공군과 아군의 첫 전투인 운산 전투(10월 25일〜11월 3일) 직전의 일이다.(핼버스탬, 37쪽).
미군과 국군은 초산과 운산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대규모 참전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소홀히 취급하고 무시했다.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후 모습을 감췄는데 치고 빠지는 중공군의 전술을 알지 못한 것도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대한 오판에 영향을 주었다. 워싱턴 지도부도 중공군이 참전한다해도 압록강 연안의 수력 발전소 등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확보 목적이라고 봤다. 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유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북진했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도 정보부재 속에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압록강 건너 중공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총력을 기울여 참전하기로 한 것인지 물어도 워싱턴은 회답이 없었다고 주장했다.(맥아더, 227쪽)
● 맥아더, 중공에 대한 무지와 오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빛을 바래게 하는 맥아더의 잇단 중공군 대응 부실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먼저 무지와 오만이다. 워커 후임 8군 사령관 리지웨이나 마셜 장군 등은 중국 근무 경험이 있어 중공군에 대한 이해가 있었지만 맥아더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 필리핀 등에서 오래 머문 그의 머릿속 중국 대륙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어떤 방법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과신했다. 공습을 받으면 발이 묶이고 기동성이 떨어진 일본군과 달리 야간에 엄청난 속도로 기동하는 중공군은 상황이 달랐다. 이런 중공군에 대한 무지가 맥아더의 오판과 실수를 불렀다는 것이다.(핼버스탬, 567쪽).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다. 중국은 만주에 30만, 그중 압록강을 따라 10만〜12만 5천 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중 5만 내지 6만 명 정도가 넘어올 수 있지만 그들은 공군이 없다. 밀고 내려오면 대살육이 벌어질 것이다”고 자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을 만났을 당시 중공군 2개 야전군(18개 사단)이 이미 만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중공군이 참전한다고 하면 미국내 반전 여론을 부추길 수 있고, 참전 가능성을 부인해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정일권, 223쪽)
하지만 맥아더는 후에 회고록에서 자신의 정보부가 만주와 압록강 연안에 대부대가 집결되어 있는 것은 파악했으나 그들의 저의는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맥아더, 214쪽). 이승만은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아직 한반도에 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한 것이 다행이라고 봤다.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까지 했다. 철수한 뒤 참전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다.(프란체스카, 11월 29일자)
● 맥아더, 공군력 제한에 대한 불만
맥아더는 공군력 제한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가 적 병력의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변해 적이 아무리 괴롭혀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문제라고 불만을 나타냈다.(맥아더, 218쪽)
맥아더는 11월 7일자 전문에서 “작전 제한으로 한만국경을 넘나드는 적 공군기에 완전한 성역을 마련하여 주고 있다. 이래서는 아군의 사기와 전투능률에 미치는 영향은 중대하다” 고 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군사적 판단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군사적인 판단 이상의 것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회신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시아의 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해 유럽에 눈을 돌릴 틈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트루먼, 354쪽)
맥아더의 북진 실패에 대해 인천상륙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에 도달하는 신속한 북진이 이뤄졌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의 한 명이 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38선 돌파를 머뭇거려 공군지원이나 포병 화력도 없는 농민군(중공군 지칭)에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것이다.(러스, 284쪽)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넘은 뒤 미군은 9일에야 넘었다.
● 맥아더의 북진과 후퇴에 대한 해명
“우리의 북진으로 적들은 시간이 어긋나서 예정보다 일찍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그 결과 봄까지 대병력을 집결시켜 일거에 우리를 괴멸시키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북진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섬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규모 중공군 참전이 확인된 후 후퇴한 것에 대해 “중공군에 대항하려면 아군 병력을 적어도 3배로 늘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속하게 후퇴해 적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해 공격하기 쉽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맥아더, 228쪽)
미국의 핵무기 사용 논란
그는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자들이 핵무기 사용도 고려중이냐고 묻자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 (active consideration)’를 항상 해왔으며 이러한 무기의 사용에 대한 권한은 전투사령관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핵무기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한 듯한 인상을 줬다.(러스, 357쪽)
트루먼의 기자 회견 내용이 영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영국 하원에서 애틀리 수상을 불러 따졌다. 애틀리 수상은 급히 워싱턴으로 날아와 12월 4일 트루먼을 만났다. 트루먼과 애틀리의 회담이 끝난 뒤 백악관은 황급히 해명성명을 내놨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이 보유한 모든 무기에 대해서 그 사용 가능성을 검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아직 그런 허가는 아무에게도 나간 일이 없다. 그런 허가가 있을 경우 현지 사령관은 그 무기의 전술적 운반책임을 지게 된다”고 밝혔다. 트루먼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른바 중공군의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로 미 2사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퇴로가 막힌 동부 전선의 미 10군단은 흥남을 통해 해상 철수하는 등 중공군에 밀리는 상황에서 ‘핵무기 카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맥아더 뿐 아니라 미 행정부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빚어진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12월 24일 트루먼에게 핵무기 투하 지역을 망라한 리스트를 제출하면서 26개의 원자탄 투하를 권고했다. 여기에는 북한 뿐 아니라 만주의 중공군 및 북한군 보급선도 포함됐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핵무기는 아군에게도 피해를 주고, 정치적 파급효과도 크기 때문에 신중했고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
핵무기 사용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전 다시 검토됐다. 공산측이 미국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면서 협정에 조인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핵무기를 사용한 ‘대량보복 전략’을 구상하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제출하고 미 합참이 검토했다. 하지만 북한이 유엔군측의 휴전 협상 관련 내용을 대폭 수용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박태균, 233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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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맥아더 회고록』,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
박태균 지음,『한국전쟁』, 책과 함께, 2005.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1권. 2020.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정일권 지음,『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196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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