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의 밀레니얼 시각] 한국을 알고 싶다면 2호선 지하철을 타라
'자리' 기우제, 앉으면 '알빠노'
각자도생 사회 모든것이 있다
한국 사회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출퇴근 시간대 서울 2호선 지하철을 타면 된다. 이곳은 마치 '시간과 공간의 방'처럼 축소된 한국 사회의 핵심으로 초대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각자도생의 전쟁터다. 전쟁은 지하철을 타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퇴근길 강남 지하철은 계단까지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지하철 '타기'가 치열하다. 심할 때는 네다섯 번씩 열차를 보낼 때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집에 기다리는 아이와 아내가 있고, 카카오톡에는 "언제 와?" 혹은 "아직이야?" 같은 문자가 들어와 있다. 그러면 필사적으로 짧은 줄을 찾아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지하철에 타야 하는 마음이 된다.
여기에서 양보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다들 1초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의 눈치게임이 치열하다. 종종 새치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엄격하게 제지를 해서라도 절대 못하게 하려고 하는 편이다. 여기에서는 응급환자가 아닌 한 누구도 나보다 '급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최우선'인 상태, 내가 1등이어야 되는, 이기심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모두 서로가 그런 상태라는 걸 인지하기 때문에 '줄서기'라는 공정성의 최후 룰은 대체로 유지된다. 문제는 지하철을 탈 때인데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소리를 지르며 그만 타라고 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1초라도 빨리 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짓누르며 타기 시작한다. 마치 부동산 패닉 바잉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야 할까? 대형 입시학원에 몰리는 사교육 경쟁도 떠오른다.
다들 필사적으로 열차 입구라는 '좁은 문'을 향해 떼 지어 몰려든 이후에는, 숨 막히는 열차 안에서의 조용한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바로 자리 차지하기 전쟁이다. 일차 목표는 좌석 앞에 '서는 것'이다. 최대한 입구에서 벗어나고, 복도 중간에 끼인 상태에서 벗어나 좌석 앞에 서면 일단 성공이다. 그다음부터는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내리길 바라는 기우제가 시작된다. 처음에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만 하더라도 내 앞에 자리가 난다고 해서 '바로' 앉아버리는 것은 어딘지 품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는 1초 사이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나 또한 잽싸게 앉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이다.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면 남들이 빼앗아간다. 자기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온통 나에게 사기 치고, 내 돈을 허비하게 만들려는 존재들이 득실댄다. 가만히 있으면 다들 잽싸게 챙기는 이익 경쟁 속에서 나 혼자 벼락 거지가 되거나 도태된다. 지하철이야말로 이러한 각자도생의 전쟁터, 최전선이다.
가끔 이른 출근길이든 늦은 퇴근길이든, 내 앞사람만 일어나지 않고 다른 자리들은 다 나게 되면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생긴다. 나는 왜 이 자리를 택해서 섰단 말인가? 일말의 박탈감으로 나 자신이 미워지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산 부동산만 오르지 않을 때 느끼는 분노와 비슷하다. 그러나 반대로 내 앞자리만 나서 앉고 나면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빠노(알 바 없음)' 상태가 된다. 나는 어린아이가 지하철에 타면 멀리서도 보고 최우선으로 양보하는데, 그와 비슷한 경우가 아니라면 철저한 각자도생 모드가 된다. 만원 지하철을 매일 두 번씩 타다 보면 그런 상태가 일상화돼버린다. 다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를 괴로워하며 휴대폰에만 코를 박고 있다.
엄청난 인구 밀집, 번아웃이 된 상태, 소수의 한정된 자리를 향한 치열한 경쟁, 타인은 없고 나의 안위만이 남은 각자도생,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박탈감, 이 모든 것들이 '매일'의 지옥철에 서려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먼 이국땅처럼 어서 탈출하여 돌아갈 집만이 멀리서 손짓하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알고 싶다면 출퇴근 시간에 서울 2호선 지하철을 타라.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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