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칼국수 가라사대
파주 금촌시장에는 맛집이 몇 군데 있다. 육개장으로 유명한 집도 있고, 칼국수로 유명한 집도 있는데 내 단골은 후자다. '언칼국수'란 상호를 가지고 있는데 '언' 옆에 한자로 '言'이라고 적어놓았다. 칼국숫집 이름치고는 상당히 '지적'이고 기괴할 정도로 특별한 편이라 저 글자 앞에서 명상에 빠져보았다. 어느 날 칼국숫집에서 오래 일한 아주머니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원래는 시장통에서 '언니칼국수'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확장 이전하여 상호 등록을 하려다 보니 이미 같은 이름이 같은 지역에 등록돼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글자를 뺐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세상일은 늘 이런 식이다.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만 진실은 엉뚱한 곳에 있다. 아무튼 언칼국수는 전형적인 시장칼국수의 오라를 갖고 있다. 전라도 여수에서 올라온 큼지막한 멸치로 기본 육수를 내는데 여기에 이 집만의 특별한 조미료들이 듬뿍 가미가 되는 것 같다. 국물을 마셔보면 멸치 맛이 아주 진하고 감칠맛이 최대로 농축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칼국수의 매력은 이것 말고도 많다. 이 집에서 면을 써는 분은 남자와 여자 각각 1명이 있는데 주야 교대로 칼을 잡는다. 밤에 일을 하는 남자는 좀 얇게 썰고, 낮에 일하는 여자는 좀 굵게 썬다. 그래서 낮에 가면 부드러운 면발을, 밤에 가면 탱글탱글한 면발을 즐길 수 있다. 그다음은 고명인데 국수를 삶고 토렴해 육수를 붓고 난 뒤 생파, 김가루, 유부를 듬뿍 얹어준다. 이 조합은 거의 환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릇을 들어 국물을 한입 들이켤 때 입으로 굴러 들어오는 생파의 향긋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다대기. 언칼국수는 숟가락 3분의 1 정도 양의 다대기를 그릇 가장자리에 붙여서 갖다준다. 그러면 입맛에 따라 풀어서 먹는데 이걸 풀어야 진정한 국물이 완성된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이들은 다대기를 빼달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꼭 풀어서 먹는다.
지난 10여 년간 내가 SNS를 통해 꾸준히 칼국수 먹는 장면을 올렸더니 서울에서 파주로 놀러온 사람들이 데려다달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직접 방문해서 먹은 뒤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는데 평가는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역시 사람들에게 육수에서 강하게 풍기는 조미료의 향이 감점의 요인이 되는 듯했다. 게다가 부드럽고 순한 맛을 즐기는 이들에게 언칼국수는 비교적 잔인한 맛이기도 하니까. 음식은 궁합이다. 언칼국수는 나한테 맞는다. 하지만 너무 자주 가면 곤란하다. 그 짠 국물을 다 마시면 혈압 건강에 이상이 오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칼국수로 책을 한 권 쓰고 싶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별로 특색 있는 칼국수의 명인들을 취재해 칼국수 전국 지도를 그리고, 그 안에 얽힌 우리 음식문화의 깊은 맛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다. 강원도에 가면 장칼국수가 있고, 충청도로 가면 국물이 걸쭉하고 시뻘건 칼국수가 있고, 경상도에 가면 건진 국수라고 해서 면을 국물에 적셔 먹는 칼국수가 있다. 안동에 가면 육수를 고기로 내고,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바지락칼국수는 도대체 그 기원이 어디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호박과 감자를 넣어 풍미를 높이는 칼국수가 있는가 하면, 말갛게 아무것도 넣지 않은 국물에 매운 고명을 올려 먹는 충무로식의 칼국수도 있다.
중국에 도삭면이 있고, 일본에 우동이 있고, 신장에 신장면이 있고, 이탈리아에 파스타가 있다면, 한국엔 칼국수가 있다. 파스타가 주식인 이탈리아와는 달리 밥이라는 절대 지존이 군림하는 한국에서 칼국수는 언제나 이등 시민이었고, 옛날의 패스트푸드였다. 잔치국수의 소면이 줄 수 없는 풍부하고 꽉 채우는 식감. 그런 면에서는 또 수제비와 칼국수는 동급이다. 수제비는 칼국수조차 만들어 먹을 여유와 시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뚝뚝 뜯어서 던진 생애의 짧은 점심이다.
시인 기형도는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나선형으로 돌돌 말려서 진한 국물 속으로 잠겨 들어간 밀가루의 향처럼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 속에 자신만의 향기를 녹여내고 있을까. 말씀 '언言'을 상호로 쓴 언칼국수처럼, '칼국수 가라사대'의 자격이 충분한 이 음식 이야기를 언젠가는 한번 건드려보리라.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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