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하나, 작품은 둘 원 스테이지 공연의 묘미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수원시청이 있는 인계동에 위치한 경기아트센터는 우리나라 공연장이 밀집한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지하철로 꼬박 1시간20분 걸린다. 서울 소재 직장인이라면 평일 저녁 7시반 공연을 보려면 6시에 출발해야 겨우 극장에 도착할 수 있는 먼 길이다. 하지만 공연을 사랑하는 시어터 애호가라면 그 짧지 않은 여정을 상쇄해줄 만한 신선한 공연들이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이나.
6월29일부터 7월9일까지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리는 경기도극단 2023년 레퍼토리시즌 두 번째 공연 '원 스테이지(One Stage)'가 그것이다. 원 스테이지는 제목이 아니라 형식이다. 동일한 무대에서 순차적으로 두 개의 작품을 공연한다는 의미다. 각각의 공연은 단막으로 공연과 공연 사이에 인터미션이 있다. 두 작품은 《갈매기》와 《죽음의 배》다.
수준 높은 동시상연 무대
물론 복수의 작품이 같은 무대를 공유하면서 공연하는 방식이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을 비롯해 역사가 깊은 해외 페스티벌이 열리는 극장에서는 같은 무대에서 하루에도 여러 편의 공연이 연달아 열리기도 한다. 이는 국내 연극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페스티벌은 그 특성상 무대를 거의 비우고 각종 기자재 사용을 최소화하는 등 작품 사이의 무대 전환 시간 단축이 필수적인 요건이어서 단촐한 형태의 워크숍이나 실험극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이번 '원 스테이지'에 포함된 두 작품은 정식 공연 무대와 같은 수준을 갖추고 있다. 베테랑 무대미술가 이태섭의 디자인으로 경사가 있는 무대와 기본 구조물을 두 작품이 함께 사용하며 조명도 각각의 작품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인 배치가 이뤄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현장의 음향이나 의상, 분장 디자인, 심지어 스태프도 두 작품이 공유하는 방식이다. 다만 출연 배우들은 구분되기 때문에 사전 연습은 두 작품이 별개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스케줄을 조정하고 리허설에도 교대로 투입됐다.
사실 서로 다른 작품이 같은 무대와 스태프 인력을 공유하는 이러한 제작 방식을 일상적으로 기획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배우 단원들의 소속감이 높고 인력 교류가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공공 극단 같은 곳이라면 새롭게 시도해볼 만한 기획이다. 제작비 절감은 물론이고, 같은 기관에서 제작한 두 레퍼토리 작품이니만큼 서로 연관된 색깔을 관객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한자리에서 수준 높은 두 작품을 동시상연(Double Feature)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소비자(관객)들의 만족도 상승일 것이다.
먼저 《갈매기》는 공연계에서 40년 이상 인간의 내면 탐구를 중점적으로 실행해온 한태숙 연출가가 오랜만에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담당한 작품이다. 무대 위에서 오랜 시간 연기자로 살아온 한 여배우의 이야기를 독특한 형식으로 담은 창작극이기도 하다. 그간 묵직한 주제를 독창적인 무대 언어로 풀어낸 파격적인 연출로 명성을 쌓아온 한태숙 연출가는 현재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임하며 자신의 색깔로 직접 연출한 《파묻힌 아이》 《멕베스》 등 여러 문제작을 연달아 소개하며 극단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도 하고 있다.
세대를 초월한 두 연출가의 만남
이번 작품은 한태숙 연출가가 1950년생 동갑내기 김성녀 배우를 염두에 두고 창작했다. 여주인공 '성녀'를 맡은 김성녀는 한국인의 해학과 놀이문화를 무대에 잘 녹여낸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시리즈로도 유명하지만, 자타 공인 창극과 연극계에서 모두 큰 업적을 이룩해 왔다. 올해 19년째 공연 중인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2005)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서 팔색조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인간문화재급 배우다.
이 작품에는 배우 김성녀가 연습하는 백스테이지의 서사가 소개되기도 하는데 같은 제목의 체호프 소설 《갈매기》의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이 현실과 환상의 무대 장면을 넘나드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김성녀는 공연 내내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는 열연을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은 극 중 스태프 역할과 비둘기, 갈매기, 까마귀 등 각종 새소리를 내는 앙상블로 출연한다. 무대 스태프의 시간에 해당하는 백스테이지 리허설 장면과 관객들의 시간에 해당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극중극 장면들이 병치돼 묵직함과 소소함을 넘나드는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두 거장의 무대가 끝나고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인터미션이 지나고 두 번째 작품이 시작되면서 원 스테이지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작품 《죽음의 배》는 선원증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해 버림받은 선원 필립의 삶을 그린 동명의 고전 영화(《Das Totenschiff》, 1959)를 각색한 작품이다. 2019 서울연극제 대상작 《집에 사는 몬스터》, 2021 동아연극상 작품·연기·연출상 수상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명성을 쌓은 신예 연출가 임지민이 맡았다. 앞서의 경사 무대는 뱃사람들 사이의 탐욕이 오가는 갑판과 선실로 변모하는 등 임지민 연출이 전작들에서 보여준 특유의 공간 분할 기법으로 신선하게 표현됐다.
1984년생인 임지민 연출가와 한태숙 연출가는 세대를 초월하며 원 스테이지(One Stage)에서 그만의 감각과 스타일로 두 작품의 공통 주제인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감'을 각기 빚어냈다. 이번에 두 작품이 인터미션을 전후해 별개로 진행됐지만 차후에는 극단 배우들이 양쪽에 캐릭터로 연결되고 서사적인 면에서도 중첩되는 부분이 생긴다면 또 다른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공연계의 새로운 기획과 시도에 대해 항상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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