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살며 생각하며]

2023. 7. 7. 11: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아파트에서 마주친 꼬마 아가씨
두 손 가지런히 모으며 배꼽인사
초등학교 시절 배곯던 제자 보고
부러 혼낸 뒤 도시락 주던 선생님
서울 밤하늘엔 여전히 별이 총총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머리에 노란 나비 리본을 예쁘게 꽂은 처음 보는 꼬마 아가씨랑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풀고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며 배꼽 인사를 하는 그 품이 정말 사랑스럽고 예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하고 빙그레 웃으며 다정히 인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하다가 ‘헉’ 하고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내 맘과 달리 그의 엄마가 언짢아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2017년 3월 26일에 방영된 ‘KBS 전국노래자랑 서산시 편’에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를 멋지게 불렀다. 그러자 진행자 송해 선생이 놀라워하며 “남자가 맞나 어디 고추 한번 만져 보자” 하며 그의 아래쪽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돼 국민 MC 송 선생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품위유지 위반’ 권고처분을 받아 한동안 논란이 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어린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그 나라와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이 있게 마련이다. 송 선생의 ‘고추 한번 만져 보자’라는 표현도 우리 민족의 언어 관습에서 유래한다. 주로 남자아이에게만 쓰는 이 말 속에는 ‘남자로 대를 잇는다’는 남성 본위의 전통적 사회구조와 의식이 깔려 있다. 오늘날과 달리, 성희롱의 의미가 아니라 ‘예쁘다’는 뜻과 ‘남아 선호’에 대한 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기가 예쁘면 이웃 사람들이 “아유, 참 밉상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아기 엄마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곤 했다. 홍역·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등의 백신이 없던 그 시절, 이들 질병으로 백일도 채 못 넘기고 아이를 잃는 일이 더러 있었다. 사람의 명(命)을 저승사자가 관장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라 “아유 정말 예쁜 아기다” 하고 칭찬하면 이 소리를 들은 저승사자가 나타나 아이를 냉큼 잡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쁠수록 반어법으로 ‘밉상이다’라고 해서 저승사자를 따돌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습이나 문화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과 가치를 달리한다. ‘고추 한 번 따먹자’라는 말은 이제는 성희롱의 한 범주에 해당할 수 있고, ‘참 밉상이다’라는 말은 모욕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사기를 당해 길바닥에 쫓겨나 있던 때의 일이다. 당시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뒤에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었다. 그날 나는 다 쓰러져 가는 우리 집으로 오실 선생님께 무엇 하나 대접할 게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도착하셨고, 너무나 곤궁한 우리 집 형편을 보신 선생님께서 대뜸 “호섭아, 목이 마르다 물 한 잔만 다오” 하셨다. 끓인 보리차도 있을 리 만무한 우리 처지에 “선생님예, 이것밖엔……” 하며 수돗물을 한 대접 받아 드렸다. 벌컥벌컥 그 큰 대접의 물을 바닥까지 드신 선생님께서는 “앗따, 느거 집 물은 정말 맛있다, 한 그릇 더 다오”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 점심시간 전 수업 때면 나를 교단으로 불러내 발바닥을 때리며, “이호섭! 고개 바로 세워라. 고개가 삐뚤면 네가 보는 모든 세상이 다 삐뚤어진다”라고 호통치셨다. 억울했다. ‘항상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있는데 왜 저러시지?’ 고개를 정중앙으로 세우고 두 눈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그 큰 사랑을 내가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다.

점심시간 직전, 선생님께선 꾸중만 하시는 게 아니라 “출석부 가지고 교무실로 와”라고 매정하게 말씀하셨다. 무서움에 달달달 떨리는 가슴으로 교무실로 갔다. 난롯가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은 “앉거라. 이거 먹어라” 하시며 양은 도시락을 건네셨다. 놀라서 “예?” 하며 멍하니 서 있으면 “한창 클 때는 많이 먹어야 하능기라” 하시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네주셨다.

그랬었구나! 가정방문 때 가난한 나의 처지를 보셨던 선생님!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늘 학교 뒤편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우던 제자가 자존심이라도 상할까 하여, 다른 학우들이 모르게 일부러 호통쳐서 출석부를 핑계로 교무실로 부르신 것이었구나! 그리고 말없이 제자를 끌어안아 주시던 그 사랑을 나의 전신에 파종하셔서, 이제는 가수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나로 하여금 그 사랑을 가요계에 퍼뜨리게 하신 것이었구나! 정녕 존경스러운 선생님, 이시창 선생님! 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랑이 있었기에, 많은 가수를 가르치면서 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거저 얻었다.

이렇듯 가정과 학교교육은 그 사람의 인성뿐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게 한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듯이. 처음 보는 내게 그렇게 예스럽게 인사를 건네던 꼬마 아가씨의 예절로 보건대, 그 부모님의 인품도 불문가지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얼른 손을 거둬들이던 내게 “괜찮아요, 우리 아이는요”라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제야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을 얻은 양 꼬마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유, 예뻐라! 이 담에 크면 둥근 해처럼 온 세상을 다 비추는 사람 되세요”라고 축원해 주었다, 배춧잎 용돈과 함께.

이 순간에도 사회는 학교폭력과 묻지마살인, 수능 킬러문항으로 시끌시끌하다. 하지만 이런 꼬마 아가씨가 있고 이런 부모님이 계셔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오! 별이 총총…. 서울 밤하늘에도 별이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 이 꼬마 아가씨로 인해.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