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로 채운 이찬혁의 프로젝트 앨범 '우산'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이찬혁은 이번 리메이크 앨범을 "남몰래 1년 넘게 준비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이찬혁비디오. 이름 뒤에 '보는' 비디오를 붙인 건 단순히 '듣는' 음악만으로 승부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뜻이겠다. 알고 보니 영상, 비주얼 아트, 공연, 전시 등 여러 매체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이다. 앨범 '우산'의 곡 전체를 배경으로 배우가 노래하고 가수가 연기하는 긴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가 이 프로젝트로 구상한 바를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솔로 앨범 'ERROR' 때 이찬혁이 마케팅을 명분으로 펼친 다양한 기행들은 어쩌면 이 프로젝트의 예고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찬혁비디오는 그 이름 자체가 종합예술의 성명(聲明)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찬혁비디오가 그저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겠다는 뜻만으로도 비치지 않는 건 피처링 참여자들의 면면 때문이다. 거기엔 걸그룹 멤버를 비롯해 싱어송라이터와 배우, 개그맨과 모델, 인플루언서, 심지어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까지 포함돼 있다. 이찬혁은 개그맨 신봉선을 섭외한 이유를 그의 음색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앨범을 들어보면 그 이유란 러브콜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했다. 곡과 싱어의 어울림이 하나같이 잘 가꾼 정원 같고 빼어난 그림 같다. 이처럼 섭외된 이들은 평소 자신이 보여주지 못했거나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을 펼칠 수 있는 기회로, 섭외한 사람은 평소 자신이 생각해 온 것들을 표현하는 장으로 이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목소리의 발굴'이라 해도 좋을 작업이다.
발굴은 사람 섭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곡을 고르는 데까지 이어진다. 1년 준비 과정의 출발이 됐을 선곡의 도마 위에는 멜로디, 무드, 비트 면에서 세월의 공격을 비켜간 국내 모던팝/록 곡들이 저마다 생명력을 머금어 펼쳐져 있다. 그곳엔 이찬혁 개인의 음악 취향은 물론 그가 타 국내 뮤지션들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리스펙트까지 스며 있다. 더불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메인 스트림과 언더그라운드의 경계를 허무는 선곡이기도 한 동시에, 많은 대중이 잘 모르고 살지만 세상엔 이런 좋은 곡들도 많다는 이찬혁 나름의 소개요 주장처럼도 여겨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는 굳이 앨범 끝 조야한 히든 트랙을 택한 타바코쥬스의 원곡 '눈물의 왈츠'(유튜버 고영대, 임승원이 불렀다)일 것이다.
리메이크란 편곡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있던 곡을 새로 만지고 다시 부르는 일은 리메이크의 숙명이라는 얘기다. 이 앨범도 그렇다. 예컨대 이글스와 핑크 플로이드, 스틸리 댄을 한국적으로 버무렸다고 혹자가 평가한 그룹 11월의 '머물고 싶은 순간'에서 이찬혁비디오는 김효국이 흩뿌린 해먼드 오르간 대신 이현영의 트렌디 키보드를 입힌 뒤 원작자인 조준형의 기타 솔로는 뺐다. 여기서 이현영이라는 이름은 중요한데 그는 쇼트트랙 선수 곽윤기가 스타카토 창법으로 부른 '밤이 깊었네'에 글로켄슈필(Glockenspiel, 흔히 '실로폰'으로 알고 있는 악기다)을 가미한 윤시황과 함께 이찬혁 곁에서 이찬혁비디오의 리메이크 앨범을 숨 쉬게 한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현영과 이찬혁은 악뮤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기타 트랙만 20개를 뽑은 '프리덤'과 10개 버전을 만든 끝에 최종 버전을 고른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등이 그들의 공동 작업물이다. 이문세 밴드의 피아노 세션으로 10년 넘게 활동해 온 이현영은 기존에 있던 곡을 세상에 없던 곡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서 편곡의 재미를 찾는 인물로 윤상의 '이사(移徙)'에 장필순처럼 등장하는 신봉선의 보컬 솔로라든지, 드러머가 쓴 곡에서 드럼을 빼고 피아노, 기타, 첼로만 배치한 델리 스파이스의 '처음으로 우산을 잃어버렸어요'(모델 장윤주가 불렀다)를 살펴보면 그런 그의 편곡 지론을 알 수 있다.
물론 '우산'엔 아직 들을 곡들이 많다. 얼마 전 새 미니앨범으로 돌아온 마이 앤트 메리의 대표곡 '공항 가는 길'은 상큼한 밴드 사운드보다 더 담백하게 걸러져 배우 이세영(나는 그가 아역 시절 주연이었던 영화 '아홉 살 인생'의 팬이다)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특히 '머물고 싶은 순간'에서도 들려준 구본암의 베이스 솔로는 곡의 신스틸러라 봐도 좋다. 이어 국악과 모던록 사이에서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탐구한 송재경(9와 숫자들)의 감각을 만나는 '연날리기'는 배우 임시완이 불렀다. 부른 사람이 임시완이라고 써두지 않으면 싱어가 임시완인지 모를 정도로 그는 임시완이 아닌 듯 들리지만, 임시완이 연예계에 보이밴드(제국의 아이들) 멤버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리 낯설 일은 아니다. '우산'에서 편곡가로도 맹활약한 윤시황의 스틸 기타(Lap Steel Guitar)와 밴조, 이주연의 아코디언은 '연날리기'에 아련한 맛을 더했다.
이에 더해 2000년대 후반 한국 인디 음악의 새 시대를 연 싱어송라이터 윤덕원(브로콜리 너마저)의 '춤'에서 배우 신세휘의 노래는 본작의 보컬 섭외 기준이 가창이 아닌 보이스 컬러라는 걸 새삼 환기시킨다(여기선 김수환의 색소폰 연주가 백미다). 많은 사람들이 코러스에서 오리온 초코파이를 떠올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서른 즈음에'로 유명한 강승원의 곡(가사는 이홍석과 함께 썼다)으로, 배우 설인아가 원곡보다 더 쓸쓸하게 불렀다. 또 2022년 3월에 데뷔한 한로로가 마이크 앞에 선 테테(Tete, 본명 임태혁)의 곡 'Romantico'는 라운지 계열의 원작을 몰라볼 정도로 이찬혁이 기타 한 대로만 요리하며 앨범에서 가장 파격적인 편곡을 가했다. 이는 있지(ITZY)의 채령이 부른 조원선의 '도레미파솔라시도'처럼 풍성한 편곡을 지향한 트랙과 상극을 이루며 작품의 균형을 돕는다.
우산은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이찬혁은 바로 그 공간으로 조용히 팬들을 초대했다. 우산을 펼치면 이찬혁이 들려주는 음악들이 비처럼 투둑투둑 감성을 적시다 우산을 접으면 말간 햇살 닮은 미소만 남는다. 흔히 리메이크 앨범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치 상 미리 낮은 점수를 안고 출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현영과 박재범이 비튼 옥수사진관의 곡 '쉬운 얘기'로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우산'은 조금 다르다. 신봉선에서 이수현까지, 정규 앨범 작업 때만큼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찬혁의 말이 그냥 허투루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리메이크 앨범 '우산'은 열 두 트랙 내내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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