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청동기시대 ‘유럽의 뉴욕’은 여성이 지배했다
치아 유전자 분석에서 젊은 여성으로 밝혀져
무덤 나온 지역은 청동기시대 ‘유럽의 뉴욕’
세습 귀족 아니라 노력으로 권력 잡은 듯
5000년 전 스페인 무덤에서 숱한 귀중품과 같이 발굴된 유골이 여성으로 밝혀졌다. 청동기 시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던 것이다.
스페인 세비야대 고고학과의 레오나르도 가르시아 산후안(Leonardo García Sanjuán) 교수와 마르타 신타스-폐냐(Marta Cintas-Peña) 교수 연구진은 7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2008년 스페인 남서부 발렌시나의 한 무덤에서 상아를 포함해 다양한 귀중품과 발굴된 유골은 치아 단백질 분석 결과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여성에게 ‘상아 부인(Ivory Lady)’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상아, 수정 단검과 같이 묻힌 유골
당시 무덤은 모두 여러 사람이 같이 묻혔지만, 이번에 분석한 무덤만 혼자 묻혀 있었다. 무덤에서는 코끼리 엄니와 함께 고급 부싯돌, 타조 알껍데기, 호박(湖泊), 수정 단검 등 많은 귀중품이 쏟아졌다. 유골의 나이는 17~25세로 추정됐다. 사람들은 4000~5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젊은 귀족 남성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산후안 교수 연구진은 DNA보다 훨씬 단단한 치아 법랑질에 있는 아멜로제닌 단백질을 분석했다. 이 단백질은 남녀에 따라 달라 유골의 성별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쓰인다. 어금니와 앞니를 분석한 결과 X염색체에 있는 아멜로제닌 유전자 AMELX를 발견했다. 남성만 갖고 있는 Y염색체에서는 AMELY 아멜로제닌 유전자가 있다. 유골의 주인이 XX 성염색체를 가진 여성이라는 말이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이 귀족의 후예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아기 무덤에 별다른 부장품이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부의 대물림이 흔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가 출생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이 평생 이룬 공로와 업적이 화려한 무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무덤 부장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프리카코끼리의 엄니인 상아였다. 연구진은 뼈의 동위원소를 통해 상아 부인이 무덤이 있는 지역에서 주로 살았지만, 다른 지역으로도 여행을 다녔다면 그 역시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사만다 스콧 라이터(Samantha Scott Reiter)는 사이언스에 “여행 능력은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상아 부인의 몸 근처에서는 포도주, 대마초와 수은 성분의 염료인 진사(辰砂)도 나와 종교의식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준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 역시 지배계급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유럽의 뉴욕을 지배한 젊은 여성
상아 부인의 무덤이 나온 발렌시나는 청동기 시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꼽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유대의 로베르토 리시(Roberto Risch) 교수는 이날 사이언스지에 “오늘날 세비야 근처에 있는 발렌시나는 기원전 3200년에서 2200년 사이 청동기 시대가 절정에 달했을 때 450헥타르(4.5㎢)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다”며 “당시에는 ‘유럽의 뉴욕’과 같은 도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동기 시대 유럽의 뉴욕을 지배한 사람은 젊은 여성이었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이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상아 부인만큼 지위를 가졌던 남성의 유골은 발굴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신 인근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호화 무덤도 여성들이 묻혀 있어 이 지역에서 여성이 권력을 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도 비슷한 호화로운 무덤이 발굴됐다. 이 무덤은 상아 부인보다 2~3세대 뒤에 만든 것인데, 무덤에 묻힌 20명 중 15명은 20~35세 여성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의 후손으로 추정했다. 여성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었고, 뼈에서 수은 수치가 매우 높게 나왔다. 이는 상아 부인처럼 이들도 종교의식에서 진사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르시아 산후안 교수는 “이번 발견은 청동기 시대 이베리아 사회에서 여성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매우 복잡한 사회에서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연구의 장을 열었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Scientific Reports, DOI: https://doi.org/10.1038/s41598-023-36368-x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배터리 열폭주 막을 열쇠, 부부 교수 손에 달렸다
- 中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공개… 韓 ‘보라매’와 맞붙는다
- “교류 원한다면 수영복 준비”… 미국서 열풍인 사우나 네트워킹
- [증시한담] 증권가가 전하는 후일담... “백종원 대표, 그래도 다르긴 합디다”
- ‘혁신 속 혁신’의 저주?… 中 폴더블폰 철수설 나오는 이유는
- [주간코인시황] 美 가상자산 패권 선점… 이더리움 기대되는 이유
- [당신의 생각은] 교통혼잡 1위 롯데월드타워 가는 길 ‘10차로→8차로’ 축소 논란
- 중국이 가져온 1.935㎏ 토양 샘플, 달의 비밀을 밝히다
- “GTX 못지 않은 효과”… 철도개통 수혜보는 구리·남양주
- 李 ‘대권가도’ 최대 위기… 434억 반환시 黨도 존립 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