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도 아이돌도 더 ‘안전한 사랑’ 원한다 [K콘텐츠의 순간들]
“배우 OOO, 만화를 찢고 나온 비주얼.” 종종 연예인을 촬영한 포토 뉴스에서 이런 표현을 만나곤 한다. 주로 눈에 띄는 용모를 지닌 연예인에게 붙는 수식어이다. 다만 올 초 데뷔한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PLAVE)에게만은 이 표현이 다소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플레이브는 종종 ‘만화를 찢고 나온 아이돌’이라 소개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찢고’ 나온 게 아니다. 그들은 만화를 ‘입고’ 나왔다. 플레이브는 만화, 그중에서도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 장르 작품에서 곧잘 보이는 남성 캐릭터의 외형으로 그려진 ‘버추얼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플레이브는 버추얼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MBC 〈쇼! 음악중심〉 무대에 두 차례나 올랐는데, 데뷔곡인 '기다릴게'의 경우 조회수가 270만 회를 넘어서기도 했다. 신곡 '왜요 왜요 왜?'는 발매 직후 벅스 차트 5위에 올랐다. 이들이 라이브 방송을 열면 원화는 물론이고 미국 달러, 타이 바트 등 다양한 국적의 후원금이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그래픽 이미지로 디자인된 캐릭터를 앞세운 아이돌을 ‘버추얼 아이돌’이라 부른다. 이와 유사하게 캐릭터 모습으로 얼굴에 필터를 씌워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버튜버(버추얼 유튜버)’도 증가 추세다.
버추얼 가수의 역사는 길다. 아주 오래전, 사이버 가수라 부르던 ‘아담(ADAM)’이 있지 않았던가. 그 이후에도 유명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게임 캐릭터를 아이돌 유닛으로 만든 ‘K/DA’가 있었고, 실제 사람 모습과 아주 흡사하게 만든 11인조 걸그룹 ‘이터니티(ETERNITY)’도 활동 중이다. 그런가 하면 유튜브에서 뜨겁게 화제를 모았던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도 빠뜨릴 수 없다. 올 초에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넷마블이 합작하여 만든 걸그룹 ‘메이브(MAVE:)’가 데뷔하기도 했다.
버추얼 아이돌은 저마다 구현 방식에 다소간 차이가 있다. 오로지 기술만으로 움직이는 아이돌 그룹이 있는가 하면 각각의 아이돌 멤버를 연기하는 실제 사람이 캐릭터 뒤에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메이브다. 메이브는 멤버 모두 음성 AI를 탑재해 만들어진 가상 아이돌로, 모두 실제 사람과 관련 없는 가상의 캐릭터다. 반면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은 캐릭터를 연기할 이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한 사례다. 이세계아이돌은 비록 영상에선 캐릭터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그 뒤에는 캐릭터와 일대일로 상응하는 실제 사람이 있다.
5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도 이세계아이돌과 유사한 방식으로 활동한다. 기본적으로 플레이브를 이루는 멤버들은 모두 지구와는 동떨어진 ‘카엘룸’이라는 가상 세계에 살던 캐릭터라는 설정이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만화체를 상당히 흉내 낸,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만화 캐릭터에서 주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체구가 작지만 날렵한 이부터 어깨가 떡 벌어진 흑발의 캐릭터, 중세 유럽의 귀족과도 같은 금발과 늑대 인간까지.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흔히 볼 법한 북부대공, 황태자, 마탑주 등의 모습 그대로다.
대규모 자본금이 투입된 버추얼 아이돌들은 최대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반면 플레이브는 만화 캐릭터 그 자체인 아이돌을 재현한다. 기존 만화 문법에서 널리 향유되어온 캐릭터의 모습을 차용함으로써 사람과 닮은 버추얼 아이돌보다 팬들에게 훨씬 친숙하게 다가선다.
외모의 전형성은 일면 성격의 전형성이기도 하다. 만화를 오래 접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캐릭터의 외모만으로 그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귀족적인 외형을 지녔다면 친절하고 품격 있는 태도를 보여주리라 기대하고, 늑대 인간의 외형을 지녔다면 기본적으로는 차갑고 냉정하지만 때때로 장난스럽거나 귀여운 매력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플레이브는 이 같은 만화의 형식을 빌림으로써, 만화 속에서 개별 캐릭터들이 위치 지어지던 맥락까지도 통째로 무대에 옮겨온 셈이다.
누구인지 궁금한 ‘본체’
그러나 동시에 플레이브는 캐릭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꾸준하게 상기시킨다. 플레이브의 멤버로 발탁되어 개별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들은 음성 AI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안무와 작곡에도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캐릭터의 상을 만드는 데에 적극 개입한다. 이 때문에 플레이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플레이브 캐릭터 너머에서 그를 연기하는 사람, 즉 ‘본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한다. 플레이브를 포털에 검색했을 때 언제나 ‘플레이브 본체’라는 검색 키워드가 늘 상위에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신이 플레이브 멤버라고 밝힌 바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본체’로 유추되는 인물이 있을 뿐이지, 정확한 건 아니다.
‘본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버추얼 아이돌만이 지니는 독특한 특성이다. 누구인지 알아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도 말할 수 없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부캐’와도 다르다. 플레이브의 멤버로서 연기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통해 자기 본연의 개성을 드러내지만, 캐릭터의 외형이 없는 현실에서는 언제나 ‘아닌 척’ 해야 하고 팬들 역시 ‘모른 척’ 해야 한다. 우리가 향유하기로 한 건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이므로.
팬들은 플레이브를 향해 ‘사회면에 절대 나올 리 없는 아이돌’이라 말한다. 지금까지 음주운전, 마약, 성매매 등의 범죄로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나온 아이돌이 얼마나 많았던가. 플레이브는 어디까지나 만화 캐릭터로 디자인되었으므로 무대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공식적으로 그들에겐 팬들에게 비치는 것 이상의 일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추얼 아이돌을 통해 팬들은 적어도 사생활 문제에서만은 결코 실망할 리 없는 아이돌을 얻었다.
한편 아이돌을 연기하는 이들에게도 버추얼 아이돌은 아이돌로서의 삶과 일상생활을 분리할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른다. 모션 캡처 장비를 몸에 달고 있으므로 체형이 어느 정도 스크린 밖에서 공유되기는 하지만 몸이 직접 촬영되는 건 아니므로 체중 관리를 강박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픽으로 조형된 얼굴을 내보내기 때문에 실제 연기자의 얼굴은 버추얼 아이돌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성형이나 외모에 대한 부담감에서 일견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범죄와 사이버불링, 우울증과 자살 등, 아이돌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며 증가했으나 무책임하게 외면되어온 사건·사고들은 팬들에게도 아이돌에게도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버추얼 아이돌은 이 진창 같은 현실을 딛고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다. 물론 이것마저 새로운 착취로 이어질지, 아니면 여태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해방구가 될지 아직 속단할 수 없다. 여기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진실은, 팬도 아이돌도 더 ‘안전한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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