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차례 비밀접촉… 분단 후 첫 남북 합의 결실

김예진 2023. 7. 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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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남북 당국자 접촉은 이런 결의로 시작했다.

두 실무자 접촉 후 남북의 '2인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대면했고, 이듬해 7·4 남북공동성명을 탄생시켰다.

통일부가 분단 후 첫 남북 합의인 7·4성명 전후 진행된 비밀 접촉 전반이 생생하게 담긴 문서를 6일 공개했다.

상호 호의적이었던 분위기는 7·4성명 발표 후 성명 이행을 위해 구성한 남북조절위원회 때부터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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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여쪽 분량 남북회담문서 공개
이산상봉 적십자 파견원 접촉 중
‘2인자’ 이후락·김영주 만남 약속
첫 방문 허용·신변보장 절차 생겨
이후락, 김일성 예방 내용 비공개
“우리는 오천년 한 핏줄을 이어온 사람입니다. 분단의 비극을 끝장낼 때가 됐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대국은 못 되어도 대국으로부터 천대나 멸시는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김덕현 조선노동당 조직담당 책임지도원)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
1971년 당국자 접촉 당시 남북의 2인자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1971년 남북 당국자 접촉은 이런 결의로 시작했다. 두 실무자 접촉 후 남북의 ‘2인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대면했고, 이듬해 7·4 남북공동성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결의는 5년을 넘기지 못하고 1976년 중단됐다. 7·4 공동성명 발표 후 세부 이행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측이 군사적 조치를 우선하거나, 남한 내 공산주의 활동을 보장하라는 등 첫 약속과 달리 억지 주장을 펴며 파행했다.

통일부가 분단 후 첫 남북 합의인 7·4성명 전후 진행된 비밀 접촉 전반이 생생하게 담긴 문서를 6일 공개했다. 남북회담 문서 중 1971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의 정치 분야 문서다. 총 1678쪽분량이 해당되는데, 200여쪽이 비공개처리돼 약 1400여쪽 원문이 공개됐다. 이번 3차 공개된 문서는 지난해 1·2차 공개 때 나오지 않은 당국자 간 정치 분야 회담이다.

정홍진·김덕현 비밀접촉이 1971년 11월부터 11차례 진행됐고, 이후 고위급 정치 회담으로 이어져 박정희 대통령 최측근인 이후락과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가 나섰다. 7·4성명 발표까지 이어진 비밀접촉은 총 15차례다. 둘은 “윗분들 생각을 잘 아는 김 선생과 내가 이러한 짐을 짊어지고 나갑시다”(이후락)라며 숨 가쁘게 접촉했다.
신변 보장 각서 박정희정부 시절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성철 북한 부총리 등 일행의 서울 방문에 앞서 신변안전 보장을 약속한 각서(왼쪽 사진). 오른쪽은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같은 취지로 우리 측 이 중정부장에게 제시한 각서다. 통일부 제공
이 과정에서 남북 간 최초로 상호 방문을 허용하고 신변을 보장하는 절차도 생겨났다. 6·25전쟁 후 처음 대화에 나선 양측은 서로 신변을 보장하는 각서를 썼고, 외국에 대사를 보낼 때처럼 신임장을 쓰기도 했다. 이 문서는 김영주, 이후락 명의로 발급됐고, 두 2인자 본인이 직접 평양과 서울을 방문할 때는 별도의 신임장이 사료집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박성철 북한 제2부총리의 서울 박정희 대통령 예방, 이후락의 평양 김일성 예방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공공기관정보공개법과 회담문서공개심의회의 논의 결과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이번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상 발언인 만큼 신중을 기한다는 취지다. 남북회담 문서 공개 심의는 3년 주기여서 2026년 다시 공개할지 논의한다.

이번에 공개되진 않았지만 생생한 언급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녹음을 허용했는지, 녹취록이 존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이 생성됐는지 등 문의에 통일부 당국자는 확인이 어렵다며 다만 “녹취록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상호 호의적이었던 분위기는 7·4성명 발표 후 성명 이행을 위해 구성한 남북조절위원회 때부터 바뀐다. 1973년 6월23일 박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등 북측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왔다. 1974년 광복절 박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불신이 고조하며 회담은 막말이 오가는 등 최악으로 치달았다.

남측은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문세광이 북측 지령을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는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측을 강하게 성토했다. 이에 북측 류장식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은 “그따위 날조를 어디다 함부로 해”라며 부인했다.

결국 1975년 북한이 남북조절위 11차 회의에 불참했고 이듬해까지 회의 개최를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이후 회의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북측 일방 통보로 남북직통전화도 운용이 중단됐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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