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장마와 기도하는 마음

관리자 2023. 7. 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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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됐다.

자신이 늦봄에 심은 모가 여름 더위와 장마 속에서 어떻게 자라고, 가을 하늘 아래 얼마나 열매 맺는지, 그 과정 전체를 깨닫고 느끼게 될 것이다.

장화 신고 우산 쓰고 장갑 끼고 호미 들고 옥수수를 하나씩 줄 맞춰 심어가노라니, 담을 함께 쓰는 성당에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깊진 않지만 기도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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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수해이후 비오면 걱정
그래도 내가 할 일은 해나가
생태관찰 유치원생들 맞고
어렵사리 구한 옥수수 심고
성당서 치는 종소리 들으며
작물 잘 자라길 빌기도 하고

장마가 시작됐다.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며 강둑으로 나가는 이웃들이 적지 않다. 2020년 여름, 전남 구례와 곡성 등이 수해(水害)를 입었다. 3년이 지났지만 범람하는 강물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비가 듣기 전 서둘러 감자부터 수확했다. 퇴비를 넉넉하게 준 후, 흐린 하늘 아래서 고구마순을 심었다. 감자를 캐기 직전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순을 심고 나니 비가 촉촉이 내려 뿌리가 제대로 났으면 싶다. 기르는 작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비에 대한 입장도 다른 것이다.

비가 내리더라도 할 일은 해나간다. 5월말부터 6월초까지 손모내기를 했던 곡성지역 유치원 어린이들이 한달 만에 다시 논 생태관찰체험을 하러 왔다. 논에 사는 다양한 생물을 직접 보기 위해서다. 모가 얼마나 자랐는가부터 확인하고, 우렁이와 풍년새우와 긴꼬리투구새우를 찾느라 바쁘다.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쓰고 우의를 입은 채 논두렁에 서서, 농부과학자 이동현 박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다. 논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는다. 어린이들은 추수할 무렵 다시 올 예정이다. 자신이 늦봄에 심은 모가 여름 더위와 장마 속에서 어떻게 자라고, 가을 하늘 아래 얼마나 열매 맺는지, 그 과정 전체를 깨닫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빗속에서 옥수수를 심었다. 전북 남원까지 가서 어렵게 모종을 구했다. 고구마만 심어도 되지만, 지난해에 깃발을 든 호위병처럼 잘 자란 옥수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늦게 심은 만큼 늦게 수확해서 먹기로 하고, 옥수수 모종을 마련한 것이다. 장화 신고 우산 쓰고 장갑 끼고 호미 들고 옥수수를 하나씩 줄 맞춰 심어가노라니, 담을 함께 쓰는 성당에서 종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호미질을 멈춘 채 무릎을 펴곤 일어섰다.

서른세번 연이은 종소리가 들리는 동안, 밀레의 ‘만종’ 속 농부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모았다. 신앙심이 깊진 않지만 기도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안식에 들기를, 강물이 무사히 바다에 가 닿기를, 새로 심은 작물이 튼튼하게 커가기를!

밭에서 종소리를 들은 적은 여러번이지만 한 손에 우산, 한 손에 호미를 들고 서 있기는 처음이었다. 콩잎과 오이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생소했다. 어린 고구마잎도 비와 처음 만나는 순간을 작고 불규칙한 소리로 들려줬다. 볕 쬐는 잎들은 종종 살피고 묘사해왔지만, 비 맞는 잎들의 춤과 노래를 내 문장으로 담은 적은 드물었다. 가뭄 뒤 물 만난 뿌리처럼, 크기도 모양도 위치도 다른 텃밭의 잎들도 함께 기쁠까. 사나운 비가 힘겹고 아프진 않을까.

종소리가 끝난 후 다시 앉으며 허리를 숙이는데, 무릎과 허벅지가 동시에 가려웠다. 나무처럼 서 있던 내게 모기를 비롯한 풀벌레들이 달려든 것이다. 모종을 마저 심고 방으로 돌아와선, 붉게 부푼 부위에 약부터 발랐다. 되짚어보니, 밭에 나가기 전에 벌레 기피제를 바지에 뿌린 기억이 없었다. 우산에 호미에 장화에 모종까지 챙기느라, 습관처럼 찾던 기피제를 집지 않은 것이다.

집필실에 출근해서 창을 활짝 열어도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사이 강물이 불어났을 테니, 개들과 점심 습지 산책도 어려울 듯했다. 우리에서 내보낸 거위와 오리들만 비를 맞으면서도 신나게 논을 헤엄치며 다녔다.

유치원 어린이를 태운 미니버스 넉대가 들어왔다. 지난 이틀은 아침에 잠깐 비가 잦아들었는데, 오늘은 오후까지 계속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도 어린이들과 함께 논으로 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웃으며 더욱 반갑게!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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