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지렁이 도로’, 노인 교통사고 낮췄다
지난해 한국에서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 933명 중 59.8%(558명)는 65세 이상 노인이었다. 2015년(50.6%)보다 9.2%포인트 올라간 수치로 매년 높아지는 추세다. 이에 각 지자체가 교통 약자인 노인을 보호한다며 ‘실버존(노인 보호 구역)’을 지정하고 있지만, 지역별로 편차가 크고 유명무실한 경우도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사회에 진입해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에 고심했던 싱가포르는 지난 2014년부터 실버존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싱가포르는 실버존으로 지정되면 국토교통청(LTA)이 나서서 기존 도로를 아예 갈아엎는 대대적인 공사를 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문가들이 사고 다발 지역의 노인 보행 패턴과 교통량 등을 분석해 실버존으로 정하고, 이에 맞게 도로를 완공하는 데 최소 1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이다.
지난 4일 찾아간 싱가포르 웨스트코스트의 한 호커센터(야외 식당가) 인근 도로도 이러한 방식으로 탈바꿈한 실버존이다. 2차선인 이 도로를 지역 주민 왕천후아(77)씨가 건너려고 하자 서행하던 차량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이날 왕씨가 건넌 도로는 약 400m 구간이 실버존으로, 지난 2일 도로 공사가 끝나 차량 운행이 재개됐다.
노인 보행자가 많았던 이 도로는 실버존 공사 이후 모양새가 완전히 바뀌었다. 널찍했던 도로 가운데 1~2m 너비의 잔디밭이 놓이면서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도로가 좁아졌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었던 도로가 이제는 곳곳이 굽이져 지렁이 모양이 됐고, 40~50m 간격으로 촘촘히 과속방지턱도 놓였다. 운전자가 실버존 제한속도(시속 40㎞) 이상으로 달리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물리적 환경을 바꾼 것이다. 실버존으로 진입하는 교차로의 모양도 기존의 ‘T’ 자에서 ‘Y’ 자로 바꿨다. 차량이 속도를 늦추도록 진입 구간에 굴곡을 준 것이다. 왕천후아씨는 “근처에 큰 도로와 교차로가 많아 화물차들도 쌩쌩 달렸던 도로였는데, 안전하게 탈바꿈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인도에서 도로로 이어지는 실버존 보행로 높낮이 차이도 완전히 없애 평평하게 만들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휠체어를 타는 노인이 도로로 진입할 때 약간의 높낮이 차이도 위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횡단보도의 녹색 신호 시간도 수십 초 늘렸다. 이날 1시간 동안 지켜본 웨스트코스트의 실버존에는 도로변에 잠시라도 주정차하는 이가 없었다. 도로가 좁고 곳곳이 굽이지게 만들어져 도로변에 차를 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가장 최근 완공된 이곳을 포함해 실버존 30곳이 설치됐다. 2025년까지 20곳을 더 만들어 50곳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작년 108명이 보행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중 노인(60세 이상)은 23명으로 21.3%를 차지했다. 한국보다 보행 중 노인 사망자 비율이 훨씬 낮은 셈이다.
한국에도 2008년부터 실버존이 생겨나 현재 전국적으로 1700여 곳이 지정돼 있다. 싱가포르와 면적이 비슷한 서울에도 187곳이 운영 중이다. 그러나 실버존으로 지정만 할 뿐 제대로 된 안전시설 설치나 단속은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2020년 기준 노인 10만명당 7.7명이 보행 중 교통사고로 사망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싱가포르처럼 도로를 갈아엎어 운전자 주행 환경을 바꿔야 사고 예방 실효가 있는데, 한국은 표지판만 가져다 놓는 ‘무늬만 실버존’ 숫자만 늘리는 실정”이라며 “특히 노인을 대상으로 한 실버존은 관심도가 낮아 방치되고 있는데, 스쿨존과 통합 관리하는 방안이 시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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