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시장 개입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쟁들
지난달 열린 ‘2023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다시 강조했다. 재정지출은 늘 뜨거운 감자이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면 ‘세금을 낭비하면서 눈 먼 돈이 풀린다’는 우려가,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 ‘정부의 공적 역할을 방기한다’는 비판이 나오곤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정부의 재정 건전성 강조는 보수주의자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정책 방향이다.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경제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나눈다. 경제적 진보주의자는 정부가 개입해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고, 보수주의자는 정부가 끼어들어 자원 배분을 왜곡하기보다는 가능하면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양자의 대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진보주의의 시대였다. 산업혁명 이후 최악의 위기였던 대공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보주의 경제학이 권위를 얻었다. 시장이 창출하지 못하는 유효 수요를 정부가 만들어야 한다는 경제학자 케인스의 아이디어는 미국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의 뉴딜 정책을 통해 발현됐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이 초래한 국가 주도 전시경제 체제 또한 막대한 관제 수요를 만들어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광범위한 개입이 나타나면서 미국의 극보수주의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고 공격했지만, 그는 4선 대통령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남겼다.
진보주의의 득세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정부가 큰 역할을 해야 했기에 세금을 많이 걷었다. 1960년대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90%대에 달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가 책임지는 요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당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지향점이었다. 존 F 케네디 사후 대통령에 취임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는 진보주의자들의 로망이 집결된 슬로건이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진보주의자들의 이론적 토대였던 케인스 경제학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진보주의자들의 과도한 재정지출과 베트남 전쟁이 인플레이션의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뉴딜과 2차 세계대전으로 흥했던 진보주의 경제학은 위대한 사회 구현을 위한 과도한 지출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쇠했다.
1980년대부터 보수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정부 그 자체가 문제이다’라는 취임사로 1980년대를 열었다. 감세와 규제완화, 민영화가 1980년대 이후의 시대정신이었고, 이런 흐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까지 이어졌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큰 이슈가 됐던 미국 연방정부 부채 한도 협상이 대표적 사례이다. 미국의 국가부채 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쭉 증가해왔는데, 민주당 정부에서 부채 한도 증액을 요청할 때 야당인 공화당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분란이 일어나곤 했다. 특히 정부 부채가 단기간 내 급증한 직후 부채 한도를 증액할 때 논란이 치열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재정지출이 급증한 직후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에서 벌어진 2011년 협상, 코로나 팬데믹으로 막대한 재정이 집행된 직후 민주당 바이든 정부에서 벌어진 올해 협상이 그랬다.
올해 부채 한도 협상 과정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민들에게 현금 지원 형태의 막대한 보조금이 지급됐고, 연방준비제도의 양적완화로 엄청난 유동성이 풀려 있는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재정지출이 급증했기 때문에 보수 정부하에서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만하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의 재정 의존도가 줄어들기보다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민간의 활력 저하를 재정지출로 완충시키는 일은 서구 선진국과 일본 등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경제의 재정 의존도가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한 시기가 2015년부터였다는 점이다. 보수 정부였던 박근혜 정권 후반부였다. ‘줄푸세’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철학을 가진 정부에서 재정의 성장 기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과거 정부 중 가장 급진적인 부동산 규제 정책을 내놓은 것은 어느 정권이었을까?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노태우 정권이라고 본다. 정책 자체로 보면 그렇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토지 공개념, 토지초과이득세 등이 부동산 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대책으로 거론됐다. 결국 실행되지 않은 공약으로 끝났지만, 토지 공개념은 ‘사유재산에 대한 부정’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토지초과이득세는 ‘미실현 이익에 대한 과세’라는 점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에서 급진적인 부동산 대책이 고려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는 무관하게 급진적인 대책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동산 투기에서 비롯되는 폐해가 너무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평균의 함정에 빠져 있다. 올 하반기에는 반도체 경기가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이럴 경우 수출을 매개로 성장률은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성장률이 개선되더라도 그 과실이 자영업을 비롯한 내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많이 느슨해졌다. 또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세계화 시대의 미덕도 크게 퇴색했다.
내셔널리즘이 득세하면서 자국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산업 정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특정 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일은 그 자체가 직접적인 재정지출은 아닐지라도 경제적 자원 배분에 정부가 개입하는 행위이다.
정부의 곳간이 무한정 채워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흥청망청 쓰는 일은 맹목이지만, 시장에서 이뤄지는 자원 배분이 최고의 선이라는 생각 또한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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