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79) 광화문 버스정류장

기자 2023. 7. 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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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같았던 ‘라떼의 버스’…이젠, 완전공영제가 답이다
서울 광화문 버스정류장(1971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서울 광화문 광장 인도(2023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나는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같은 자리 앉아 있는 그녈 보곤 해.” 1996년에 나온 ‘Bus 안에서’ 노래 가사가 말하는 버스 풍경은 평화롭다. 하지만 1971년 서울시 버스에서 이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의 버스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버스 안내양(차장)’이 짐짝처럼 차에 올라탄 승객들을 밀어넣고 “오라이!”라고 외치며 버스를 탁탁 치면 그제야 차가 출발했다. 승객이 너무 많으면 안내양이 몸으로 승객들을 받치고 ‘개문발차’(開門發車)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 운전사가 버스를 왼쪽으로 운전한다. 차가 기울어지면서 승객들이 ‘관성’의 힘으로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비로소 안내양이 버스 문을 닫았다. 이때 문을 닫지 못하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담당한 안내양의 하루 근무시간은 평균 18시간이 넘었다. 하루의 격무가 끝나면 이른바 ‘삥땅’을 방지하기 위한 명목의 몸수색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임금과 비참한 작업환경, 성차별과 인권유린의 현장, 그곳이 1970년대의 시내버스였다.

지금은 교통카드를 찍고 승하차하지만, 그때의 중·고등학생은 종이로 만든 ‘회수권’을 사용했다. 회수권을 한 장씩 잘라, 롤러가 달린 철제 회수권 케이스에 넣어 다니기도 했다. 10장짜리를 교묘히 잘라 11장으로 만드는 못된 ‘기술’을 구사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복사기 등장 이후에는 위조 회수권도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회수권은 금속제 ‘토큰’으로 바뀌었다가 교통카드로 변경되었다.

2004년 서울 시내버스 체계 개편으로 ‘준공영제’가 실시됐다. 준공영제는 시에서 노선을 정하고 수익금은 운행 실적에 따라 배분하되 적자는 시에서 보조하는 것이다. 결국 민간 버스업체의 수익을 승객의 요금과 세금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버스는 ‘완전공영제’로 가야 한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공익적 활동이므로, 권장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운영비는 소득에 따라 과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부담으로 귀착시켜야 한다.

1971년 버스는 작고 문은 하나다. 사진이 찍힌 장소를 찾아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정류장에 가보니, 이제는 ‘차 없는 광장’으로 바뀌어 버스정류장은 사라지고 없다. 상전벽해의 현장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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