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대화에 대하여
내가 아는 대화는 셋이다. 우선 지하철 3호선 끝에 있는 ‘大化’. 기차는 혼자 도착하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굉음과 한 시대를 몰고 오기도 한다. 오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 기운을 느끼고자 한다. 오금에서 출발한 전동차가 종점인 대화역으로 진입할 때 나는 앉아 있지 않는다. 점심 무렵이라 거의 텅 빈 객실에서 일어나 어느 땐 말안장에 탄 기분, 어느 땐 괴나리봇짐 메고 방울소리 울리며 당나귀 끌고 가는 느낌을 혼자 만끽하는 것.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 버스정류장에 가면 구두수선방이 있다. 길바닥으로 난 작은 쪽문 입구에 빨간 글씨의 팻말이 성실하게 놓여 있다. ‘금이빨 삽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십여분 동안, 구두와 이빨의 만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는 ‘大化’답게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겠다. 버스로 환승하여 대화를 빠져나갈 때 또 다른 대화가 떠오른다.
그것은 평창에 있는 大和. 꽃산행에 빠져 강원도를 이리저리 누빌 때 이정표 하나가 번쩍 눈에 뜨였다. ‘진부, 봉평, 대화.’ 어디인지 알겠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그 지명이 아닌가. 어느 날은 작정하고 대화에서 하룻밤을 잘 때, 그 맛있는 소설을 읽으며 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발굴해 내었다.
나는 본고사 세대다. 그 무렵 서울대학교 입시에 이런 국어문제가 출제되었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이 글에서 주인공이 오늘밤 가야 하는 행선지는 어디인가?
마지막은 어디에서나 흔히 있는 對話. “대화. 명사.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고 국어사전은 풀이한다. 마이크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할수록, 일방적인 전자기기가 기승을 부릴수록 대화는 시들해지고 점점 실종되어 간다. 이 캄캄한 시대에 우리의 행선지는 어디인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선 만남이고 나발이고 변화도 없다. 메밀꽃이 피어도 보아줄 상대가 없다면?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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