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전국의 곱슬머리들에게

김은경 기자 2023. 7.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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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두 달 전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일기예보를 보고 기함을 했다. 올여름 7~8월 중 닷새만 빼고 서울에 내내 비가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였다면 정확도 떨어지는 두 달 후 예보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비는 다른 문제다. 땀과 비의 계절이 두려운, 나는 곱슬머리다.

한국에서 구불구불 부스스한 자기 머리카락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중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은 “머리가 지저분하다”고 혼냈고 짓궂은 동창은 “바야바” “해그리드”라고 놀렸다. 유행가 가사만 봐도 그렇다. 눈 감아도 생각나는 그녀는 긴 생머리고(틴탑 ‘긴 생머리 그녀’), 참 어째도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것이 곱슬머리다(박혜경 ‘빨간 운동화). 심지어 ‘곱슬머리하고는 말도 말랬다’는 속담까지 있다. 고집이 세고 인색하다나. 수모의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된 뒤로는 3개월에 한 번씩 매직 스트레이트 펌을 하면서 곱슬머리를 꼭꼭 숨기고 살고 있다.

2019년에 나온 10부작짜리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 주인공인 오시마 나기도 그랬다.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느라 온갖 귀찮은 일과 동료의 실수마저도 떠맡는 도쿄의 직장인. 남들에게 맞춘다고 고군분투하는 나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게 곱슬머리다. 지독한 곱슬인 그는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좋다는 남자친구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서 매직 펌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 아침 출근 전 한 시간씩 매직기로 머리를 지진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들은 남자친구의 자기 뒷담화에 큰 충격을 받고, 그길로 근교 마을로 떠난다. 민낯에 복슬복슬한 머리카락 그대로.

나기는 자유로워졌을까. 새 인생을 살겠다며 충동적으로 탈출했지만 해방감은 잠시였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방황하고, 새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눈치를 본다. 엄격했던 엄마를 보러 가는 날엔 뽀글뽀글 머리를 다시 곧게 펴기도 한다. 그래도 줏대를 되찾아보려고 부단히 애쓴다.

곱슬머리 커뮤니티 ‘꼽쓰리’를 발견한 것은 얼마 전이다. 남녀 불문 전국의 곱슬머리들이 모인 곳. 곱슬을 잠재우는 법이 아니라, 더 돋보이게 관리하는 법을 공유하고, 매직 펌에서 벗어난 ‘탈(脫)매직’ 후기를 올린다. 꼽쓰리에 따르면 곱슬머리가 부스스하고 빗자루 같은 건 직모에 적합한 제품과 관리법만 썼기 때문이다. 탱탱한 곱슬머리를 만드는 관리법이 따로 있다는 것. 그 길은 다만 험난하다. 곱슬에 적합한 제품은 더 비싸고, 관리법이 복잡한 데다 본래 컬(curl)을 되찾기 위한 인고의 시간도 견뎌야 한다.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지천으로 넘쳐나지만 다짜고짜 사랑하란 말이 공허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보다 부끄럽고 미웠던 콤플렉스를 긍정할 수 있는 모습으로 가꾸려 노력하는 이들에게 훨씬 마음이 쏠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도 인스타그램에는 뿌리기만 하면 곱슬기를 잠재워준다는 스프레이 광고가 떴다. 아마도 같은 광고에 혹했을 모든 바야바, 해그리드, 폭탄 머리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찰랑찰랑한 생머리만큼이나 탱글탱글한 우리 머리도 사랑스러워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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