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전 ‘막장의 원조’가 무대로 왔다
“순수귀신을 몰아내라! 살아있는 문학이 아닌 죽은 문학을 추구하니 순수 ‘귀신’이지. 독자야 이해하든 말든 쓰고 싶은 글만 쓰겠다는 작가들은 순수귀신에 눌렸거나 순수귀신 그 자체다!”
예술을 ‘순수’와 ‘대중’으로 손쉽게 나누는 일은 100년 전에도 고질병이었나보다. 무대 위에서 호통치는 여성은 소설가 김말봉(1901~1961). 일본 교토 도시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로도 일했던 그는 여성의 삶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한 ‘통속 소설’로 필명을 날렸다. 그의 소설 세 편과 그 시절 가요들로 구성한 연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김말봉의 작품세계’가 서울 명륜2가 한성아트홀에서 공연 중이다. 청순가련 여주인공이 겪는 가혹한 운명과 그 위에 엇갈리는 거짓말, 불륜, 음모, 살인까지…. 마치 요즘 ‘K-막장’ 드라마의 ‘원조’ 같은 이야기를 1930년대 모던 경성 스타일로 풀어낸 무대에 관객들은 배꼽을 잡는다.
배우들은 100년쯤 된 옛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무대 위로 소환해 마치 요즘 일인 양 생명을 불어넣는다. 단편 ‘고행’은 첩의 집에 갔다가 본처가 찾아오자 벽장에 숨어든 바람둥이 남편을 골려주는 경쾌한 코미디. 1937년 조선일보 연재 소설 ‘찔레꽃’은 극 전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 “신문 연재를 하루만 걸러도 ‘왜 오늘 안 실렸나’ ‘딴 걸 빼더라도 실어 달라’는 전화와 편지가 정신없이 쏟아졌다”(본지 1938년 11월 9일 자)는 기록이 남을 만큼 당대 경성을 뒤흔든 소설이다.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간 처녀와 가난한 연인, 그 집 유학파 딸과 ‘민중을 위한다’며 헛바람 든 장남의 연애 감정이 마구 엇갈리고, 신분 상승을 꿈꾸는 악인의 음모는 인과응보 벌을 받는다. 시종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찔레꽃’에서 부잣집 딸이 가난한 남자와 함께 말을 타다 반해 버리는 장면은 압권. 목마를 타고 내달리며 연기하는 남녀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객석이 폭소로 들썩이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연극은 광복 후 김말봉이 공창제 폐지와 성매매 여성 구제 운동을 하며 쓴 소설 ‘화려한 지옥’을 통해 앞선 생각을 가진 여성운동가로서의 측면도 조명한다.
무성영화의 변사 혹은 만담가 역할을 하는 해설자 배우들이 관객에게 말을 걸며 극을 이끌고,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더튠’은 폴카와 트로트가 뒤섞이거나 일본풍 영향을 받은 당대의 인기 가요를 재해석한 라이브 연주로 옛 이야기와 현재 관객의 간극을 좁힌다.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남명렬 배우가 김말봉의 아버지와 그의 소설 속 바람둥이 남편이나 허위의식에 찬 부르주아 가장 같은 역할들을 맛깔나게 소화한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극단 수수파보리의 정안나 대표는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인물들을 발굴하는 낭독극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김말봉을 발견했다. 낭독극과 지난해 산울림소극장 초연을 거쳐 이번에 재연 공연을 올리게 됐다. 정 대표는 “나날이 흐려지던 김말봉을 선명하게 복원해낸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진선영 박사와 김말봉 전집을 출판한 소명출판사의 진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라며 “이렇게까지 빠져들 일인가 싶을 만큼 김말봉이라는 인물에 푹 빠져서 반년을 공부했다. 그의 일대기로도 충분히 또 한 작품이 가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많고 흥미로운 분”이라고 했다. 공연은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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