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쓰기’는 아동학대가 아닌 인간해방
언어는 본능이다. 인간은 몸·말·그림 그리고 글씨와 같은 언어로 감정을 표출한다. 노자가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 있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항상 있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라고 언어 이전의 세계를 노래했지만 ‘도’도 ‘명’도 언어가 아니면 드러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고 했듯 삼라만상은 언어로 이름하고 써낼 때 비로소 태어난다.
요컨대 언어는 실상을 드러내는 방편이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는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까지 한다. 문자가 없으면 실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이 한 획(劃)을 긋고, 문자를 ‘씀’으로써 실상이라는 존재는 그 모습을 비로소 드러낸다. 문자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무의식계를 탐사하고 그려내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문자경영이 인간경영이고, 문자정책이 복지의 궁극이자 토대가 되는 이유다.
최근 한 게시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일부 학부모들이 받아쓰기·일기쓰기를 아이들에 대한 ‘정서적 학대’라고 주장하면서 학교에 민원을 제기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들도 알림장은 인쇄해 주거나 학급 홈페이지나 단톡방에 올려버리고, 일기는 사생활 침해라 해서 요즘은 거의 안 쓰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자문명·문화의 대전환은 붓과 펜 글씨 쓰기에서 키보드 치기로 일상이 대전환된 이상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쓰기’의 포기가 야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국어맞춤법의 정오(正誤)나 글씨 쓰기의 잘잘못에 있지 않다. 한 획을 긋는다는 것 자체가 정보전달 이전에 인간의 감정표출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치기’로 대체됨으로써 모든 예술과 언어의 고향인 ‘쓰기’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치면 칠수록 인간이 기계가 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인간이 인간을 부정하게 된다는 끔찍한 결론에 이른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글씨를 생명으로 여긴 퇴계도 글씨를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가 하는 제자 김돈서의 편지에 주자의 말을 빌려 “글씨를 잘 쓰려고도 못 쓰려고도 하지 마라. 한 점 한 획에 오로지 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點點劃劃 一在其中)”고 답장을 하고 있다. 글씨 쓰기의 잘잘못보다 그것을 경(敬)의 자세로 임하였는지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선악의 잣대로 글씨를 재단하여 학생 스스로는 물론 선생님과 학부모가 스트레스를 받아 ‘쓰기’ 자체를 내다버릴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키보드를 치면서 야기되는 산만한 정신을 우선 문제 삼을 때가 오늘날이고 보면 지금이야말로 쓰기 그 자체의 본질적인 가치 찾기에 몰입할 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붓글씨 쓰기는 정신일도가 우선인 만큼 질서정연한 획일적인 기계글씨와 함께 만이면 만 다 다른 삐뚤빼뚤 못 쓴 붓글씨가 만개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바른 글씨를 뒤집어엎고 천진난만한 어린이 글씨로 되돌아간 대명사는 추사의 봉은사 <판전板殿>(그림)이다. 문자반야의 경지에서 노니는 추사체(秋史體)야말로 악필 중의 악필이라는 것은 역설이지만 키보드 치기 시대 한가운데인 오늘날 더 큰 시사점을 준다. 이 기회에 ‘쓰기’ 철학을 기계와 인간의 공존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정립할 때가 왔다. ‘쓰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토대이자 궁극의 언어행위다. 치면 칠수록 기계가 되고, 쓰면 쓸수록 인간이 된다. 천진(天眞)의 세계에서 노는 ‘동자체(童子體)’야말로 기계시대 인간 해방의 길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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