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집 <게 눈 속의 연꽃>
비 오고, 하루 이틀 해가 쨍하면 바야흐로 풀들의 전성시대. 고추밭이고 땅콩밭이고 상추밭이고 아주 풀투성이이다. 제초매트로 덮어놓은 고랑 위에서도 풀들은 뿌리를 내린다. 심지어 맨홀 뚜껑 위로도 무궁화와 잔디가 삐죽이 솟아오른다. 그제 아침 분명히 낫질했는데, 꿈에서 호미질했나 싶을 만큼 풀의 왕국은 건재하다. 큰 풀 아래서 빛을 덜 쬐어 납작 엎드려 있던 어린놈들이 밤사이 쑥 올라온 모양이다.
오늘 아침, 칼날이 톱니 모양인 부추 베는 낫을 들고 지심(김)을 매는데, 산에서 내려오던 이웃들이 텃밭 울타리에 서서 뭐라 하신다. 거기 땅콩도 심었나 봐. 아래 큰 밭에 심지 그랬어…. 이런 유의 관심은 괜한 참견이 아니라 호의이자 호기심이다. 나는 답한다. 그땐 마늘 때문에 밭이 모자라서 못 심었다고, 한 달 늦게 몇 알 심어봤다고, 실험 삼아 해봤다고. 많이 늦어도 자라는지, 담벼락 그늘에서도 되는지…. 근데 그렇게 잘 자랐어? 두 분 시선이 낫으로 베어놓은 곤드레에게 동시에 간다. 그거 잘 안되는 건데 잘 자랐네… 씨 맺으면 씨나 좀 주소…. 내 바구니에 그득한 곤드레나물이 언니들이 들고 있던 작은 비닐봉지로 두어 움큼 이사간다.
어제 아침 이 시간엔,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간 동네 언니 뒤따라 응급실에 갔다. 법 없이도 살고, 법 모르고도 잘 살아온 언니는 말 때문에 법정에 서게 생겼다. 직접 들은 말도 아니고 누군가 전한 말 때문에, 그것도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파출소 근처도 안 가보고 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온 순박한 사람이 고소를 당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했겠는가. 고구마 캐면 고구마 쪄서 나르고 옥수수 따면 옥수수 쪄 나르고, 동생들 이웃들 모두 제 몸처럼 챙기던 사람 아닌가. 오죽하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서 신경과까지 드나들었겠나. 응급실로 들어가니 감긴 언니 눈자위에 탁구공만 한 보라색 멍울이 져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찰공화국에서 산 지 1년여, 우리 동네도 까딱하면 법대로 하자, 법으로 하자는 판이 되었다. 너무도 가까이에서 들리는 가파르고 거친 말과 행동들이 가느다란 희망의 촛불조차 꺼지게 한다. 그 사이 내 속도 시끄럽고 난폭해져 간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상식 밖의 일들에 절망하다 보니, 평화라든가 민주라든가 자유라든가 우정이나 이웃이나 사랑이라는 말이 영영 지켜지지 않을 헛된 약속처럼 느껴진다. 낡고 녹슬어 풀도 못 벨 낫이 되어 버린 죽은 말처럼 여겨진다.
쪼그려 앉아 채송화 꽃을 보다, 고개를 드니 백합이 피었다. 응급실 거쳐 입원한 언니가 2년 전, 두어 포기 건네준 어린 백합이 자라 저리 하얀 나팔들을 불고 있다. 사랑이여, 희망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로 간다”. 절망 없이 자라난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절망이라는 바닥 없이 솟구쳐 오르는 희망이 과연 간절하기나 할 것인가. 진실이여, 사랑이여,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김해자 시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문기의 추석 선물’ ‘딸에게 보낸 동영상’···이재명 ‘선거법 위반’ 판결문
- 조국 “민주주의 논쟁에 허위 있을 수도···정치생명 끊을 일인가”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사라진 돌잔치 대신인가?…‘젠더리빌’ 파티 유행
- “민심의 법정서 이재명은 무죄”···민주당 연석회의 열고 비상행동 나서
- 40대부터 매일 160분 걷는 데 투자하면···수명은 얼마나 늘어날까?
- 드라마인가, 공연인가…안방의 눈과 귀 사로잡은 ‘정년이’
- 중학생 시절 축구부 후배 다치게 했다가···성인 돼 형사처벌
- 은반 위 울려퍼진 섬뜩한 “무궁화꽃이~”···‘오징어게임’ 피겨 연기로 그랑프리 쇼트 2위
- ‘신의 인플루언서’ MZ세대 최초의 성인···유해 일부 한국에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