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마가린 말고 총토장
없던 게 보이면 신기하고 있다가 없으면 섭섭하다. 버터도 그랬다. 우유에는 상당한 단백질과 지방이 깃들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우유의 단백질을 굳혀 치즈를 만들고 지방을 분리해 버터를 만든다. 매일 양·염소·산양·말·소·물소·야크·낙타 등 네발짐승한테서 젖을 받아, 생젖은 물론 다양한 유제품을 만들어 먹어온 사람들한테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더구나 젖소는 젖을 내는 특별한 품종이다. 홀스타인 등은 송아지를 낳고 300일이나 젖을 짤 수 있다.
하지만 양은 드물고, 소는 밭갈이에 부리는 일소가 다였던 한반도의 사정은 달랐다. 젖소는 19세기 말에나 한반도에 들어왔다. 송아지를 낳은 한우 일소로부터 잠깐 받은 우유와 그 유지방은 귀한 약재였다. 문자로야 수유(酥油, 버터 또는 유지방), 제호(醍醐, 버터) 같은 말이 문헌에 남아 있다. 하나, 일상생활엔 없었다.
그러다 수유도 제호도 아닌 버터(빠다, 뻐터)가 19세기 말을 지나며 바다를 건넜다. 서양인과 함께 미국과 유럽산이 먼저 들어왔고, 모리나가유업(森永乳業)의 영업과 함께 일본산이 뒤따랐다. 버터 바른 빵, 버터 넣은 과자의 풍미는 금세 신청년, 신가정을 사로잡았다.
한편 버터가 폐결핵에 좋다는 소문도 났다. 그런 가운데 품질을 따졌다. ‘고유한 향기, 물기 없는 표면, 수분 25% 이하, 지방 80% 이상, 염분 3% 이하’의 버터가 좋다는 가르침이 언론에 실렸다. “인조버터(마가린)는 소기름, 돼지기름, 야자유 같은 것으로 만”들며, “이것은 천연버터에 비하여 소화에 나쁘며 비타민이 없는 것이” 버터와는 다르다는 잘못된 정보도 함께했다(이상 <동아일보> 1929년 11월12일자 ‘뻐터의 선택은’에서).
독일 소식을 전할 때에는 독일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여파로 ‘진정한 뻐터’는 못 먹고 대용품 곧 마가린을 먹고 살아 안됐다고도 했다(<동아일보> 1921년 5월21일자 및 1928년 6월21일자).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버터의 소비자가 겹쳤다.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을 지나며 미국과 그 우방국의 대일 무역 제재가 본격화하자 버터는 귀하신 몸이 된다. 일본 역내의 버터 생산량이 얼마 안 되던 시대였다.
이윽고 대용품이 등장한다. 마가린이 아니다. ‘총토장(葱土醬)뻐터’가 대용품이다. 지난 회에 이어 다시 영업 비밀을 흘린다. 독해부터 해야 한다. 총(葱)은 양파, 토장(土醬)은 된장이다. 어떻게 만드는가. 간 양파 80g과 얇게 켠 가다랑어포(削節) 10g을 물 100㏄에 섞어 충분히 끓인 다음, 여기다 다시 물 100㏄에 설탕 50g과 된장 100g과 밀가루 30g을 녹여 앞서 만들어 놓은 것에 더해 휘저어가며 끓이면 “조선 사람에게는 더욱 적합한” 버터 대용품이 된단다. 총토장은 더구나 중국 만두나 감자빵에 “특히 잘 맞을 것”이란다. 이상 <동아일보> 1938년 6월9일자 ‘맛좋은 총토장뻐터’의 내용이다.
살펴보니 ‘양파된장소스’에 억지로 버터라는 말을 갖다 붙인, 그야말로 ‘괴식’이다. 그거라도 해 먹자고 했다. 어느새 버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없으면 섭섭한 사물이 됐다. 한 세기도 안 되는 사이 일상의 추이가 이렇다. 이 추이에 ‘시대’라는 말을 갖다 붙여본다. 또한 영업 비밀의 일단을 다시 흘렸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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