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이원정'] 알 것 같은데 모르겠는, 알고 싶은 배우
다채로운 모습, 그리고 앞으로 보여줄 무궁무진한 매력
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계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도 많고, 이들을 팔로우하는 매체도 많다. 모처럼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내용도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마저 소속사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현실에서도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샛별 기자] "오늘 너무 많은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아요.(웃음)"
늠름하게 들어오더니 때에 따라 능글맞게 인사를 건넨다.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더니 씩씩하게 이겨낸다. 높은 자존감을 자랑하는데 사실 그 안에는 아픔도 많았으며 고단한 환경을 견뎌야만 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때로는 너스레도 섞어가며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지만, 지난해 겪은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하며 눈물도 보였다. 인터뷰 한 시간 만에 여러 모습을 봤건만 여전히 궁금하다. "물음표를 남기고 싶다"는 배우 이원정의 목표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원정이 출연한 KBS2 월화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극본 백소연, 연출 강수연, 이하 '어그대')는 1987년에 갇혀버린 두 남녀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간 여행기로, 과거 연쇄살인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선 윤해준(김동욱 분)과 백윤영(진기주 분)이 서로 목표가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원정은 극 중 백윤영의 아버지인 백희섭의 1987년 젊은 시절을 맡아 활약했다. 해맑고 활기찬 겉모습에 단순한 성격의 백희섭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받은 상처와 외로움을 지닌 인물이다. 백윤영의 친구로서 때론 장난스러운 '케미'를, 서지혜가 연기한 젊은 시절 순애와는 풋풋한 러브라인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
지난 20일을 끝으로 작품을 떠나보낸 이원정은 "시원섭섭하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작품이다 보니 희섭이가 안 끝날 줄 알았다. 더 이상 희섭이를 연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커 섭섭하다. 반대로 그만큼 작품이 나오기까지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했기에 시원한 마음도 있다. 첫 주연이라 긴장도 했는데 많은 사랑을 받아 행복했다"고 전했다.
이원정이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백희섭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자신만의 무기' 덕분이었다. 백희섭의 휘황찬란한 전라도 사투리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가진 매력과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오자는 생각과 함께 오디션에 임했다. 그 무기는 바로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이었다. 이원정은 "실제로 감독님께 캐스팅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다. 거침없고 겁먹지 않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고 했다. 내 무기가 통했던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오디션장은 '나'라는 사람과 '나'의 유니크함을 충분히 보여줘야 하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연기는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저로서는 연기를 잘하기란 쉽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란 사람을 잘 녹여냄으로써 각인시켜야 하는 수밖에 없죠. 그렇게 인연이 된다면 이번 작품에서 떨어지더라도 언제 어디서 다시 볼지 모르잖아요.(웃음)"
2001년생,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이원정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의 '건강한 마인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타고난 건 아니었다. 이원정이 짧지 않은 시간을 겪으며 견고하게 쌓아 올린 자존감이었다.
사실 이원정은 어려웠던 가정환경과 인종차별 등을 겪으며 친구를 만들 겨를도 없이 힘들었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좌절감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도 있었지만 이원정은 "날 단련한 시간"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는 "물론 아프고 힘든 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인 것 같았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사람이 돼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기 때문에 도태되고 싶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이원정의 거침없는 면모는 백희섭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사투리를 실감 나게 구사해야 했던 그는 캐스팅이 결정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전라도로 향했다. 현지화된 사투리를 무작정 들려줄 때도 있었다. 그중 몇몇은 본인들보다 잘한다며 감탄했다. 다만 '옛날 사투리'라는 평을 들었단다. 80년대를 연기해야 했던 이원정으로서는 오히려 좋았다. 친구 할머니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당시 녹음은 촬영 내내 이원정의 교과서가 됐다.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매일 자기 전에 반복해서 들었어요. 일상에서도 사투리로만 말을 하려고 했죠. 덕분에 에피소드가 많아요. 사투리는 무슨 말이든 앞에 '시방'을 붙이는 것처럼 절반이 욕처럼 들려요. 대본상에는 '아따'가 많았는데 실제로는 '니미'를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연기하면서 '아따'가 아닌 '니미'가 계속 나와 NG를 낼 때도 있었죠. 촬영이 끝난 뒤에도 당황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나오더라고요.(웃음)"
이원정을 보고 있으니 '배우를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원정은 백희섭뿐만 아니라 매 캐릭터를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구축한다. "연기 연습에 따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매 순간 연기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원정이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그동안 다른 생활도 해야 하잖아요.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을 했더니 답은 하나였어요. 둘을 합치는 거였죠. 사람을 만날 때 말투나 성격을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로 바꾸는 거죠. 매일매일 그 캐릭터로 살았기 때문에 촬영장에서는 싱크로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연기는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존재하면' 돼요. 연극을 영어로 하면 'Play(플레이)'인데, 다른 뜻으로는 '논다'예요. 전 촬영장에서 희섭으로서 존재하며 놀면 되는 거죠."
이원정이 이번 작품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백희섭의 아픔'이었다. 극 중 백희섭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가족을 잃었으며, 1987년도 학생 운동에 앞선 백윤섭과 함께 모진 고문도 받는다. 이원정은 "작품의 큰 줄기도 아니고 한 인물의 과거일 뿐이지만, 무조건 잘 표현해내고 싶었다. 아무래도 욕심이 났다"고 밝혔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참혹함을, 누군가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배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당시를 연기하기 위해 역사 공부도 했는데 정말 잔인하더라. 내가 배우고 느꼈던 부분을 잘 표현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원정은 '어그대' 촬영 중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안동에 로케이션을 떠나 있던 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것. 이원정은 "어머니도 누나도 촬영하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을 못 했더라. 이모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상황을 알게 됐다"며 "당시 교장실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발끈도 해야 했고 우스갯소리도 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만 쏟아졌다"고 털어놨다.
이원정의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동료 배우들이었다. 특히 김동욱은 곧바로 이원정을 붙잡은 채 제작진에게도 시간을 요구했다. 제작진 역시 이원정에게 "필요한 만큼 기다려 주겠다"며 묵묵히 곁을 지켰단다. 이원정은 "유골함이 너무 작더라. 한줌도 안 된다. 배우 하면서 처음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날"이라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이내 씩씩하게 웃어 보인 이원정은 "배우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밝혔다. 그는 "배우는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이지 않나. 바르지 못한 사람이 배우가 돼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간단하다. '무조건 똑바로 잘하자'는 마음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연기를 하면 실제로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배우로서는 물음표를 남기면서도 보증수표가 되고 싶단다. 물론 저 배우는 어떤 사람일지, 어디까지 성장할지, 그 끝은 어디일지 등에 대한 '좋은' 물음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확인받기 위해 사는 것 같아요. 전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저를 단정 짓는 느낌표나 온점이 아닌 끝이 없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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