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남북공동성명 사료 공개] 北 “靑 습격은 군부 맹동 분자들 짓... 다 처벌했다” 변명
통일부는 6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간 합의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하기 위한 비밀 접촉 과정을 보여주는 남북회담 사료를 공개했다. 1971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 문서 총 1679쪽 분량이다. 남북은 7·4 성명을 통해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의 3대 원칙’을 설정했는데 이후 채택된 여러 남북 간 합의·선언이 이 성명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문서를 보면 7·4 성명 발표 전 남북 고위급 인사와 실무자들의 상호 교환 방문이 숨 가쁘게 이뤄졌다.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부장과 회담했다. 이 부장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 생각했지요?”라며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방북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자 김영주는 “나는 오리라 생각했습니다”라고 했다.
회담은 평양 주암초대소에서 이뤄졌는데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1·21 사태도 대화 주제에 올랐다. 이 부장은 북측이 간첩 문제를 제기하자 “내가 할 이야기가 더 많다”며 1·21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김영주는 “군부에 있는 맹동 분자들이 조직했고 우리는 후에 알고 다 처벌했다”고 변명했다. 이 부장이 “앞으로 그런 맹동 분자가 없기를 바란다”고 하자 김영주는 “앞으로는 절대 없다”고 약속했다.
같은 달 29일에는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에서 이 부장과 만났고 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부장은 박성철에게 “어제까지 공산당 잡던 두목이 북한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적 역사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북은 이런 고위 비밀 접촉을 통해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북한이 성명 발표 9일 후인 7월 13일 판문점 실무 접촉에서 “그쪽에서 김종필 총리가 가장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후 북한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후속 회담이 난항을 겪었고, 7·4 성명을 계기로 조성됐던 화해 분위기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날 공개된 문서에는 이후락·김일성 면담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문서공개심의회가 검토한 결과 비공개 결정을 내린 것인데, 심의가 3년 주기라 2026년 다시 공개 여부가 논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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