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다시 철학에 결부시키다
김신성 2023. 7. 6. 20:27
서울대미술관 14人의 기획전
벽면을 향해 내걸린 캔버스
팝업스토어 연상 설치 작품
작업실 변천사 기록한 그림…
노동가치·생계 고민 등 담아
예술·현실의 상관성 일깨워
벽면을 향해 내걸린 캔버스
팝업스토어 연상 설치 작품
작업실 변천사 기록한 그림…
노동가치·생계 고민 등 담아
예술·현실의 상관성 일깨워
‘벽이시여 !/ 그동안 한 번도/ 그림 정면 보지 못하고/ 뒷면만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정면을 보여드리니/ 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정면이 벽을 보는 상태로 내걸린 캔버스 뒷면에 이 같은 메모를 적은 종이가 붙어 있다. 작가 주재환의 작품 ‘나타샤’다. 물론 관람객들은 그림의 뒷면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름이 나타샤로 추정되는 여인의 모습이 정말 앞면에 그려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가는 개의치 않고 익살스럽거나 유머러스한 그림들을 드넓은 벽면 한가득 풀어놓았다.
붉은 바탕 액자 안에 숟가락 하나와 쓰고 버린 한줌 휴지를 배치한 작품의 제목은 ‘휴지는 뭘 닦는지 모르고, 숟가락은 밥맛 모르고’이다. 옆 자리를 차지한 빈 액자 작품도 재미있다. 작가는 ‘고요’라는 제목 아래 마치 부제처럼 ‘너무나 많은 미술 전시, 보고 보다가 지친 분을 위한 그림’이라 적어 넣었다.
주재환은 작품을 통해 현실과 표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상징적 요소와 구상적 형태를 융합시켜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의미를 연출해 내고 마는데, 일상용품이나 농담 같은 소재들을 예술사적 맥락과 결합시키며 그 사이의 관계와 작용을 탐구한다. 우리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취시키고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일깨운다.
정정엽은 1985년부터 2017년까지 33년 동안 모두 15차례 작업실을 옮겨 다녔다. 그는 이 기간 동안 1년에 1점씩 작업실 변동 과정을 그림(‘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17’)에 담았는데, 이는 한 여성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업을 이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고군분투기다. 작업실 이동경로에서 작가는 자본과 공간, 사회와의 관계, 창작활동의 고민 등을 솔직하고 담백한 이미지로 드러낸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엄마집 옥탑방에 작업실을 마련.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활동. 긴 전철 구간 안에서 목판을 팜.’(1988 서울 답십리 옥탑방 작업실), ‘아이를 거실에 앉혀 놓고 뒤돌아 작업. 한참 뒤 돌아보니 입 속에 우물우물. 꺼내보니 까맣던 지우개 하얗게 변해 있다.’(1991 아파트 작업실 3년차, 주안 작업실 갯꽃과 병행), ‘집주인이 월세를 5만원 올린다. 부평 살림집 부천으로 이사. 시외버스를 타고 출퇴근. 졸업한 지 10년. 첫 개인전을 연다.’(1995 인천 부개동 작업실 3년차), ‘주인이 월세 10만원 더 올려 친구와 각자의 작업실 찾아보기로 결정. 집과 가까운 아파트상가 반지하작업실로 이사. … 반지하작업실 1년 만에 무릎이 상한다.’(1996 부천 괴안동 반지하작업실 1년) 등의 기록이 가슴을 친다.
이 시대의 예술은 가치에 대한 정신의 긴장이 크게 약화되면서 동시대 불행에 대해 냉담하다. 작가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이 처한 모든 상황들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에게 ‘반란의 환상, 주도권의 환상, 자유의 환상’을 주는 기술로서의 예술을 제시해야 한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 가면 이들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예술사회학을 지나야 예술철학이 나온다(작가편)’는 제목을 내건 14인의 기획전은 예술을 다시 가치의 긴장, 정신의 진동으로서 철학에 결부시키는 것, 땅과 하늘, 유한성과 무한성의 세계에 접붙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허보리의 ‘42개의 봄조각’은 완벽하지 않은 조각들의 모음으로 우리의 불안정한 현실을 표현한다. 그는 낱개로 판매되어 나간 각각의 빈 자리에 그림 대신 판매일시와 장소, 가격의 기록을 대체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실물을 갖지 못하는 주식이나 대체불가능한 토큰(NFT), 코인 등 ‘전체’가 아닌 ‘불완전한 부분’으로 거래되는 새로운 예술 유통 방식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NFT와 같은 새로운 시스템에서 작품의 개별 조각이 어떻게 부분이자 전체로서 물성을 갖는지 들여다본다. 이는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실물을 경험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연수익 1억원 이상의 작가가 되기 위한 인터넷강의 영상과 책자를 판촉하는 팝업스토어를 떠올리게 한다. 김영규의 설치작품 ‘연봉 1억 미술작가 되는 법’이다. 개인화실을 운영하는 작가의 실제상황과 대비를 이룬다. 이 작품을 본 청년작가들이 김영규 작가에게 개인면담이나 스터디그룹 강연을 요청해 왔다는 사실은 작품이 지닌 블랙코미디 요소를 한층 부각시킨다. 슬프거나 혹은 우스꽝스러운 이 부조리극은 예술계와 예술시장에 냉소적 시선을 던진다.
‘너무 더워서, 바다가 없어서’, ‘공무원들의 도시’, ‘다른 세계가 궁금해’ 등 각각 이유가 적힌 젠가게임의 블록들. 서울로 떠나가는 대구의 작가들이 털어놓는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들은 무너지기 직전의 젠가게임처럼 지역 예술계의 현실을 아슬아슬 상징한다. 김민제의 ‘Where is the exit?’(탈출구는 어디에?)는 압축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비유를 통해 지역적, 세대적 아픔을 드러낸다.
홍콩 출신의 실라스 퐁이 구축한 ‘작가의 커리어 맵’은 미술 교육기관, 미술관, 관련 해외 기관, 갤러리, 각종 미술상, 작가 운영 공간 등을 배치하고 각각의 순위를 매겨 놓았다. 국내 미술대학 순위를 보면 서울대, 홍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민대 순으로 우선 17개를 올렸다. 교수에 대한 처우 등을 고려해 나열한 배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순인데, 홍익대를 열일곱 번째 맨 뒤에 놓아 눈길을 끈다.
종이나 스카치테이프 등 일상 속 재료를 쓰는 김문기는 ‘가난한 조각가’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가지고 있다. ‘저렴한 재료 사용’,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공간 활용’, ‘스스로의 신체로 작품 운송’, ‘공간 낭비 없는 포장’, ‘제약 없이 자유로운 구성과 이미지’다. 이렇게 탄생된 그의 조각은 예술적 권위와 상품으로서 자본논리에서 벗어난, 작가와 작품 사이의 새로운 윤리관계를 만들어낸다.
김문기, 김민제, 김범, 김영규, 뀨르와 타르, 변상환, 실라스 퐁, 이원호, 정정엽, 정해민, 주재환, 최성균, 함양아, 허보리가 참여한 전시회는 오는 9월10일까지 관객과 만난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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