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시 장흥면에 푸른 산과 맑은 계곡을 배경으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시립미술관 사이에 멋스러운 장흥조각공원까지 만든 양주시의 정책이 신선하다. 2014년에 개관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관장 이계영)은 장욱진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건축한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가족을 비롯해 나무와 아이, 새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를 즐겨 그린 동심의 서양화가 장욱진(1918~1990)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진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분단과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비롯한 환란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면서 탄생시킨 장욱진의 작품들에서 발견하는 흥과 웃음과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흥미로운 기획전이 마침 열리고 있다. 지난 4일 개막한 2023 기획전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들’은 앞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는 흥미롭고 풍성한 기획전이다. 오는 11월19일까지 열리는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들’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규상, 이중섭, 장욱진의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여섯 명은 순수미술동인인 ‘신사실파’에서 함께 활동하며 한국의 현대화단에 추상미술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들이지요.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20세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자유와 소통을 향한 전위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신사실파’에서 시작한 작가 6인의 도전과 실험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국의 추상미술을 해석하는 틀로 작용하고 있지요. 한국의 모더니스트이자 추상미술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이들의 작품은 한국적 추상의 시작점과 그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명훈 학예사가 장욱진의 작품이 가진 매력의 비밀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몇 개의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장욱진의 작품이 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요? 장욱진은 대상의 본질을 끌어내기 위해 장식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며 선을 단순화시켰던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순수한 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이지요. 내면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워냄을 의미합니다. 장욱진의 단순한 선은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의 결과입니다. 단순함 안에 담긴 다양함이야말로 서구 모더니즘과 차별되는 장욱진 작품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 여섯 작가의 화두 ‘사실을 새롭게 보자’
장욱진은 1949년에 김환기, 유영국 등이 결성한 ‘신사실파’에 참여하는데 ‘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주제 의식을 작품에 충실하게 담아낸다. 장욱진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대담하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그의 말처럼 장욱진은 평생 자연 속에서 살면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단순하게 표현한 작가였다.
유명 작가 여섯 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한 자리답게 비가 내리는 궂은날이지만 관람객들이 붐빈다. 김환기(1913~1974)의 ‘산월’(1960)은 푸른 바탕에 검고 굵은 선으로 표현한 산이 품은 달이 짙은 청색이다. 산과 달과 들판까지 검고 푸르다. 무겁고 어두운 색깔은 혁명을 잉태한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백영수(1922~2018)의 ‘장에 가는 길’(1953)은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 아이를 업은 여인들이 길을 걷는 풍경이다. 백영수의 그림은 김환기와 달리 밝고 활기차다. 유영국(1916~2002)의 ‘바다에서’는 제목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이다. 대신 붉고 푸른색을 써서 답답하지는 않다. 이규상(1918~1967)의 ‘생태11’도 아주 단순하고 과감하다. 기호처럼 그려진 것이 빗방울과 눈으로 보이는 까닭 역시 작품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짙고 옅은 갈색만 사용한 것이 무척 흥미롭다.
피난처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렸을 이중섭(1916~1956)의 ‘애들과 물고기와 게’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에서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빛의 호박과 노란 호박꽃 역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려는 이중섭의 슬픈 눈이 그려진다. 몇 개의 선으로 그린 장욱진의 ‘얼굴’은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한 편의 동화처럼 그린 ‘집과 까치’(1986)도 붉은 해와 푸른 반달,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초가집 마당에 앉은 까치가 희망을 노래한다.
■ 가족 사랑과 열린 정신
2층 상설전시실에는 장욱진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 ‘채움의 방식’이 열리고 있다.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장욱진의 따뜻한 작품들을 만나는 시간은 행복하다. 마치 한옥의 안채처럼 꾸며진 전시실에 들어서면 장욱진이 어떤 방식으로 가족들을 사랑했는지 그려지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장욱진은 언제나 자신을 비우고 남은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웠던 심성의 소유자였다. ‘평상’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물론 작가 자신과 아내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아내와 아이들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강아지와 까치도 가족의 일원이다. ‘가족’은 장욱진의 영원한 주제였다. 그의 작품 앞에서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 그 소중함과 가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장욱진을 관람객들에게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한 미술관의 노력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2022SIMPLE ‘비정형의 자유, 정형의 순수’와 2022 기획전시 ‘선善도 악惡도 아닌’은 이러한 미술관의 생각을 전달하는 전시입니다.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심플’ 정신을 계승하고, 현대 작가들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연례기획전이죠. 심플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한’ ‘단순한’ ‘소박한’ 등인데, 심플은 엽서 정도의 크기, 30호 이내의 작은 캔버스에 사람, 동물, 자연을 품은 장욱진의 그림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나 어른 모두에게 쉽게 다가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매력입니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덜어내는 인고의 시간을 통해 사물의 정수만을 담아내었기에 열려있지요. 장욱진의 그림에 무위자연과 무욕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2023 기획전 ‘점 안의 우주’도 장욱진 예술의 단순함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 전시였다. 장욱진 예술의 대표적 화두인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뜻이다. 장욱진 작품의 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장욱진을 사랑하는 관객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 단순함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지혜
“장욱진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현재도 그의 심플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우리가 순수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장욱진에게서 단순함의 미학, 단순함이 선사하는 삶의 지혜까지 얻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장욱진이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라는 선불교의 ‘불사선’을 화두로 삼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가는 나와 대상이 갖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대상의 진정한 가치와 직면할 때 우리는 욕망을 바탕으로 맺어진 관계로부터 오는 정신적 공허함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푸른 산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장욱진이 평생 화두로 삼은 ‘심플’의 철학을 느끼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사이에 자리 잡은 조각공원도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예술 작품이 전달하는 통찰과 즐거움은 물론 자연이 선사하는 여유와 신선함까지 두루 만끽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예술의 명당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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