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의대 쏠림 안타까워...도전하는 의사과학자 필요“
“사람들은 융합이란 단어를 굉장히 좋아해요. 제가 전자공학과 신경과학을 공부한 것처럼 두 분야를 접목한 융합을 좋아하지만, 막상 융합을 하면 ‘쟤 뭐야’, ‘전자하던 애가 왜 여기 온 거야’라며 불편해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다른 분야에 도전한다는 건 탑 쌓기를 새로 하는 것이기도 해요. 이미 높이 올린 탑에 돌 하나 더 얹으면 잘했다고 칭찬하지만, 새로운 탑을 다시 쌓을 땐 미친 사람이라고 보기도 하죠.”
5일 개막한 제1회 세계 한인 과학기술자대회 참여차 방한한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신경과 및 공대 전자공학과 교수를 6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처럼 말했지만 그동안 말 못 할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과에서 석·박사를 지내며 해당 분야에서 자리매김했을 때 의대 영역인 두뇌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 여성 최초 스탠퍼드대 의대와 공대 종신교수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이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눈물겨운 아픔의 연속이었다.
이 교수는 “우리도 한국인과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며 "공부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두 분야를 융합하는 연구를 진행했고 외국에서 온 동양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겪어야 할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건 힘든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의사로서 의사과학자에 도전하고 싶다거나, 공학자로서 의학 분야를 접목하고 싶어하는 학생이나 학자들이 있다.
이런 후배들에게 두렵고 힘들어도 도전해보라고 말할 것이냐는 질문에 “두려운 일을 하지 않고 뭔가 되길 바라는 건 무리 아닐까. 안전하고 쉬운 것만 하면서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 안 될 것”이라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처럼, 용기 있는 과학자가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좋은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는 점에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과학진흥정책으로 과학자가 됐다는 그는 "내가 학교 다닐 땐 과학을 일으키기 위한 정책이 두드러졌는데 이젠 과학자의 길을 꺼리는 사람이 많다"며 "의대에 좋은 인재들이 많은데, 과학계 입장에선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서 의사과학자 양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와 관련 “좋은 인재들이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든다는 차원에서는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며 “하지만 미국에도 MD(일반의), PhD(의학박사)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 과정들을 밟고 나면 40대가 된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한다고 부담이 되는 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시대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팀워크, 기술 투자 필요”
이 교수가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개최하는 ‘제1회 세계 한인과학기술인 대회’(4~7일)에 특별 강연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지난해 9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한인과학자들과 약속한 자리로, 세계 한인과학기술인들이 협력망을 강화하는 장이다.
이 교수는 “한인 과학자나 한인 커뮤니티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이런 기회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왔다”며 “협업은 단체 후원 등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런 기회가 생겨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시대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기술의 주인이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라며 “이러한 시대에 생존하려면 팀으로 일해야 한다. 국내 과학자들과 해외 한인 과학자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해 힘을 합치면 많은 과학적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뇌 회로 분야에서 주목받는 학자가 됐지만 여전히 미국이라는 무한경쟁 사회에선 힘들 때가 많다고 한다. 이 교수는 “자국 출신 과학자나 기업가에 대한 지원은 많지만 한인은 지원 받는 게 없다”며 “기댈 데 없이 황야에 홀로 선 느낌이다.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뤄진다면 과학자 개인은 물론 국가 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분야든 리더십을 가지려면 10~20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장기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고도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이 스타트업, 플랫폼 사업엔 투자를 많이 했는데 기술 투자는 소홀했던 거 같다. 기술 선도 리더십이 없으면 결국 도태한다”며 “딥테크는 성장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을 자원으로 이용해 기술 선도 역할을 하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설명했다.
목표는 하나... “뇌 질환 치료 시대 열 것”
이 교수의 무기가 되는 기술은 ‘뇌 회로 분석’이다. 뇌 질환 연구 성과를 사업화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엘비스를 설립했고 AI기반 플랫폼 ‘뉴로매치’를 개발했다. 올해는 오랜 연구의 실체가 드러나는 원년이 될 전망이다. 뉴로매치는 뇌 신경 회로를 분석해 뇌전증, 치매, 파킨슨, 자폐증 등 뇌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찾는 의료기기다.
계명대 동산의료원에는 뉴로매치 연구실이 설치됐다. 첫 상용화 버전은 의사가 환자의 뇌를 살필 때 판단을 돕고 치료법을 찾도록 만드는 솔루션이 될 예정이다. 치료제 개발도 시작했다. 향후 집에서 뇌 상태를 체크하는 홈 솔루션도 만들 예정이다.
이 교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뇌 질환 치료 시대를 여는 것. 안과에서 눈을 보고 피부과에서 피부를 보듯, 신경과는 뇌를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심리검사도 하고 상담도 한 시간씩 하지만 뇌에 어떤 이상이 생긴 건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교수는 뇌 기능을 복제한 ‘디지털 트윈’을 살펴 고장 난 뇌를 고칠 수 있는 시대를 열고자 한다.
”전자회로를 고치듯 뇌도 고치자는 게 내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떠올린 막연한 생각이었습니다. 현재 뇌 질환은 조금 불편한 정도의 질환이 아니라 걸리면 장애가 생기는 질환입니다. 뇌 질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질환이기도 한데, 이 증가 커브를 꺾는 기술이 아직 없습니다. 이 커브를 꺾는 게 바로 제 꿈입니다.“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