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서울백병원 폐업과 위기의 공공의료
[슬기로운 기자생활]
임재희 | 인구복지팀 기자
서울백병원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1745억원에 달한 의료 수익 대비 누적 적자 규모도 문제였지만, 적자를 떠안은 소유주가 민간이어서였다. 학교법인(인제학원)에 1745억원 적자를 감당하라고 강요할 순 없는 일 아닌가.
폐원이 검토된다는 소식에 서울 중구보건소는 “서울백병원이 공공의료 역할을 해왔다”며 중구에 남아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서울백병원 응급실엔 하루 30~40명가량 환자가 찾는다. 그런 서울백병원이 문을 닫으면 중구에 종합병원급 응급실이 국립중앙의료원 1곳만 남아, 야간이나 휴일에 응급 환자들이 갈 곳이 부족해질 거란 우려가 담겼다.
서울시는 서울백병원 땅을 병원 이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중구와 종로구 도심 일대 종합병원들도 상업용 목적으로 매각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학교법인 쪽에 서울백병원 문을 닫고 팔아 봤자 상업적 가치는 크지 않으니, 병원 기능을 유지해 달라는 얘기였다.
이런 호소와 압박에도 인제학원 이사회는 지난달 20일 서울백병원 폐원을 결정했다. 소유주가 결정만 하면, 폐원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간 병원은 의료법상 의료기관 개설자가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진료기록부만 잘 관리해 시·군·구청장에게 폐업 신고만 하면 문을 닫을 수 있다. 의사와 간호사, 일반 직원 등 구성원 386명을 부산 등 다른 지역 백병원으로 보내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9월 전에 폐원하려고 속도를 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보건의료 분야를 취재하다 보면, 민간 병원에 지원금을 주고 공공의료 기능을 맡기자는 주장이 들린다. 전체 병상의 90%가 민간 소유인 국내 의료체계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는 일종의 현실론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공공정책수가’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흉부외과 수술처럼 생명과 직결된 의료행위에 대해 보상을 늘려주면 민간 병원들도 공공의료 기능을 유지할 거란 취지다.
그러나 서울백병원 폐원은 민간 병원에 맡긴 공공의료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부 관료들은 서울백병원이 해온 공공의료 역할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폐원은 “민간 병원이라 어쩔 수 없다”고만 했다.
“30년 동안 여기 정형외과나 내과에 다녔으니 내 차트고 뭐고 다 여기 있는데….”
인제학원 이사회가 폐원을 의결한 날, 서울백병원 앞에서 만난 이웅각(73)씨에게 폐원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 다니니까 의사나 간호사도 잘 아는데, 제일병원도 없어져서 이 동네에서 갈 병원이 여기밖에 없단 말이야.” 이씨는 믿고 다닐 만한 병원을 잃기 일보 직전이다. 이씨 이외에 일하다가 다친 을지로 인쇄소·철공소 노동자들, 외국어 통역이 가능해 서울백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외국인 관광객들도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할 처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달 3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서울백병원이) 병원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 공공의료 투자도 계획했었다고 한다. 이때 남아야 할 것은 단순히 서울백병원이라는 이름과 83년 역사가 아니다. 서울백병원이 도심에서 유지해온 공공의료 기능이어야 한다.
의료 적자에 흔들리는 건 소유주가 공공인 지방의료원들도 마찬가지다. 서울백병원 적자와 폐원으로 떠들썩했던 지난달,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전국 35개 지방의료원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평균 3.17년간 1조1243억원의 손실이 더 발생할 거라고 추산했다.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느라 떠나보낸 기존 환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서, 일부 병원에선 조만간 임금 체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방의료원들의 적자도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공공의료가 사라지는데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간다.
lim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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