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칼럼] 진실을 계속 이야기하자―연재를 끝내면서

한겨레 2023. 7. 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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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칼럼]엄혹한 시대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얼굴을 들고, ‘진실’을 계속 얘기하자. 세계 곳곳에서 천박함이나 비속함과는 거리가 먼, 진실을 계속 얘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벗이다. 오랜 세월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이 연재는 이번 글을 끝으로 마감하게 됐다. 내가 바란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동아시아에도 화약내 풍기는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좀 더 사태의 행방을 차분하게 살피면서 미흡하나마 뭔가 한마디라도 보탬이 될 만한 말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그래서 이번 글이 연재의 마지막 회이니만큼, 과거를 좀 뒤돌아보며 소감을 적어두고자 한다.

내가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때는 2005년 5월이다. 애초에는 ‘심야통신’이라는 제목이었다. 그 뒤 연재 제목과 형태가 몇번인가 바뀌었으나 대강 18년간에 걸쳐 계속 써왔다. 내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한 신문에 한 작가가 연재한 칼럼으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처음에 한겨레의 한승동 기자가 일본에 국제전화를 걸어 집필 의뢰를 했을 때 일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자이니치(재일동포) 2세인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오래 살아 본 경험도 없었다. 당연히 한국 사회의 실정에 어둡고, 국내(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어지간히 망설였으나 디아스포라(이산자)로서의 나 자신의 관점, 또 마이너리티(민족적 소수자)로서의 관점에서 문화비평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 이 일을 통해서 ‘조국’(선조들의 고향이라는 의미)의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고 싶다, ‘과제를 공유하는 동포’로서의 유대를 쌓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연재가 20년 가까이 이어진 것이다.

이런 나의 자세가 어느 정도 이해를 받으면서 수용된 결과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 내 ‘초심’이 어느 정도 실현됐을지, 아니면 공허한 꿈에 지나지 않았을지, 그것을 지금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나 자신의 인생에서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 객원교수로서 체류할 수 있었던 경험까지 포함해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을 통해서 많은 한국의 선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대다수의 재일동포들이 조국 분단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 때문에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해방 뒤 지금까지 이미 80년이 가깝도록 이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자라고 또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느샌가 이런 상황을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평화로 가는 꿈, 통일의 꿈, 어느새 그런 꿈을 단념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친해진 벗 ㄱ씨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두명을 데리고 굳이 일본까지 찾아와 주었다. 내 건강을 염려해서 몸 상태가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온 것이다. 내가 서울에 머물렀던 2006년, 그는 ㅇ대학에서 공부하던 철학도였다. 몇번인가 세미나 강사로 나를 불러 주었다. 나는 그와의 교우를 통해 한국의 ‘선하고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배웠다. 그 시절에 그는 성악가인 멋진 여성과 결혼해서 육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기록한 책도 썼다. 한국에 체류하지 않았다면 그와 사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얕은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탈리아 가곡을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원기 왕성했고 기가 막힐 정도의 식욕을 거리낌 없이 발휘해 주었다.

나보다 30살 정도 젊은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직 어린 아이들, 이 ‘선한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운명을 살아가게 될까? 부디 평화를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조국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향유하기를 바란다. 아니 ‘조국의’라는 말도 필요 없다. 나와 ‘친한 사람’과 그밖의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사람들, 특히 부조리한 역경을 강요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미얀마, 그런 곳의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뒤돌아보면 내가 머물렀던 시대의 한국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문민정권 시대,긴 군정을 극복하고 아직 문제투성이라고 하면서도 희망과 활력을 느끼게 해 주었던 시대였다.

나 자신은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그 새로운 숨결을 접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내가 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받아들여진 것도 그런 시대의 공기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지금은 윤석열 정권 아래서 한국 사회는 역회전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남북 대립의 위태로운 시대가 다시 찾아온 것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70년 남짓 살면서 일본과 한국에서 많은 것을 봐온 나는 쉽게 낙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나처럼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 그래도 한마디 충고를 한다면,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효율이나 속도보다 더 나은 다른 가치를 소중히 여겨 달라는 것이 될까. 말하자면 인문주의적 사고를 중히 여기고 인간미가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떠올려 보고 싶다. (왜 1967년 이후 정치적 실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팔레스타인 투쟁이 정의에 대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의 승산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계속 말하려는 의지의 문제였습니다.”(<펜과 칼>)

우리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계속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엄혹한 시대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얼굴을 들고, ‘진실’을 계속 얘기하자. 사이드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천박함이나 비속함과는 거리가 먼,진실을 계속 얘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벗이다.

오랜 세월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번역자인 한승동 기자와 편집부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2023년 7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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