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정치 팬덤,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23. 7. 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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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다이내믹 도넛
국회 본회의장. <한겨레> 자료사진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언론이 ‘정치 고관여층’이라고 부르는 이들 상당수는 사실 정치과몰입자 혹은 정치 팬덤이다. 그들은 당내 계파 싸움 양상, 여의도 뒷소문에는 빠삭하지만 정작 그 당이 추진한 정책과 역사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정치가 가치의 쟁론에서 멀어지면서 권력 자체를 위한 내전으로 환원될 때 민주주의는 토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쉽다.

내 소셜미디어에 밑도 끝도 없이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다. 왜 이러나 싶어 살펴보면 작성한 모든 글이 민주당과 국민의힘 얘기다. 오프라인에서도 가끔 만난다. 다짜고짜 대통령 부인에게 여성 혐오적 발언을 쏟아낸다거나, 퇴임해서 지역에 사는 대통령을 두고도 끔찍한 욕설을 퍼붓는 이들. 배웠다는 사람, 이른바 지식인도 다르지 않다. 만날 때마다 정치 얘기만 하는 지인을 도무지 견디기 힘들어서 관계를 끊은 경험도 있다. 이들이 보이는 증상을 통칭해 나는 ‘정치과몰입증후군’이라 부른다. 이 증상은 작게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데 그치지만, 심해지면 ‘문자폭탄’으로 합리적 토론과 정당 활동을 방해하고, 막장으로 가면 드루킹 사태(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가 된다.

정치 과몰입은 정치를 선과 악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정치인(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증상이다. 광적인 동일시라는 점에서 집단적 문화 현상인 팬덤과 무척 비슷하며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 정치과몰입은 집단 차원에서 흔히 ‘정치 팬덤’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정치 팬덤이 아이돌 팬덤 같은 대중문화 팬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대중문화 팬덤이 다른 팬덤을 향한 비난을 대체로 금기시하는 데 반해, 정치 팬덤은 다른 쪽을 흡사 멸망시킬 태세로 공격한다. 물론 대중문화 팬덤에서도 갈등은 일상이며 드물게 각자의 ‘화력’을 총동원한 전면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서로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다. 속으로야 상대 취향을 경멸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공공연히 드러내선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 팬덤은 다르다. 내 정치인은 ‘개혁의 아이콘’이지만 저쪽은 ‘적폐의 상징’이다. 우리 편은 절대선이지만 저쪽은 절대악이다. 정치학자 제이슨 브레넌은 미국 유권자를 ‘호빗’, ‘훌리건’, ‘벌컨’의 세 그룹으로 나눈다. 호빗은 정치 무관심층이고, 훌리건은 편향적·광신적 지지자이며, 벌컨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유권자다. 정치학자 다이애나 머츠는 정치참여형 시민들이 거의 모두 훌리건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한다. 한국인들만 유독 광기에 차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현대 정치의 흔한 현상이라는 거다.

정치 팬덤이 극단화되기 쉬운 이유가 있다. 도덕적 확신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취향의 다름은 존중할 수 있지만 도덕의 다름은 그렇지가 않다. 도덕은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가게 하는 기본적 가정이기 때문에 양보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여러 심리학자가 밝혀낸 것처럼 이념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도덕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서로가 ‘옳음’을 강변하니 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정치 참여가 도덕의 문제이자 훌리건을 양산하는 활동이라면, 우리는 극한의 정치적 내전을 운명처럼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쉽지 않은 문제지만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실험심리학자 조슈아 그린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 판단엔 두 가지 시스템이 병존한다. 하나는 그가 “자동모드”라 부르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동기다. 다른 하나는 “수동모드”라 부르는 이성적인 동기다. 우리가 직면한 많은 정치 의제는 정교한 판단과 절묘한 절충을 요구하지만 오늘날 정치 담론은 대개 누군가를 악마화하는 일로 환원된다. 즉, “자동모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 관건은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는 양당제 정치를 탈피하는 것, 그리고 사람보다 의제를 중심으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훌리건’보다 ‘벌컨’에게 훨씬 많은 발언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주목도는 낮지만 사회적 논의가 꼭 필요한 의제들을 더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아낌없이 공적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언론이 ‘정치 고관여층’이라고 부르는 이들 상당수는 사실 정치과몰입자 혹은 정치 팬덤이다. 그들은 당내 계파 싸움 양상, 여의도 뒷소문에는 빠삭하지만 정작 그 당이 추진한 정책과 역사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정치가 가치의 쟁론에서 멀어지면서 권력 자체를 위한 내전으로 환원될 때 민주주의는 토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쉽다.정치 팬덤은 분명 대중의 주체적 활동이지만 동시에 더 깊은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왜곡된 정치 현상이다. 엘리트와 팬덤에만 맡겨두기에 정치는 지나치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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