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정보
[크리틱]크리틱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라디오에서 볼레로가 흘러나오자 택시 기사가 따라 불렀다.” 며칠 전 읽던 라틴아메리카 번역 소설에 나온 문장이다. 순간 편집자로 돌아간 나는 볼레로에 아무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아도 괜찮은지 고민이 됐다.
대중음악에서 볼레로는 19세기 쿠바에서 시작된 서정적인 가요를 가리킨다. 볼레로의 여러 뜻 중 이것만은 널리 알려진 편이 못 된다. 국어사전에도 이 풀이는 적혀 있지 않다. 이름은 생소해도 볼레로가 아주 낯선 음악은 아니다. 비틀스의 ‘틸 데어 워스 유’라든지, 왕가위가 1960년대 느낌을 내기 위해 영화에 삽입한 곡들이 그에 속한다. 얼마 전 평론가 마이클 우드는 <헤어질 결심>에 삽입된 정훈희의 ‘안개’가 ‘라틴아메리카 볼레로풍’이라고 지적했다.
원문의 볼레로를 ‘가요'로 번역하면 어떨까? 등가의 표현이라 볼 수도 있고, 이해도 쉬우니 말이다. 하지만 이 해결을 추천할 수는 없는 게, 독자들이 이거 혹시 진짜 ‘가요’인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택시 기사가 하필 한류 팬인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게 미미한 가능성인 건 알지만, 이런 과감한 번역에 불안해진다. 그보다는 그냥 볼레로라고 하는 게 미래를 내다본 해결책일지 모른다. 어떤 계기로 볼레로가 평범한 상식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2007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재번역했다. 그가 스스로 ‘열두 번 읽었다’라고 호언할 만큼 좋아한 책이다. 1950년대 시미즈 슌지의 초역에서는 소설에 나오는 퀸(queen)을 ‘여왕’으로 옮겼다. 뜻을 오해한 것인지 다른 고려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라카미는 이를 여자 옷을 입는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오카마’로 옮겨, 뜻이 좀 더 정확해졌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지금 한국어판을 낸다면 그냥 ‘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지금 출판물에서 ‘드랙퀸’에 여장 남자라는 뜻풀이를 붙일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번역이 거듭될수록 상실 없이 보존되는 정보량이 증가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위의 예가 보여주듯 자국어에 포함된 지식 역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1862)의 새 번역이 미국에서 출간됐다. 통산 17번째 영역인데, <뉴요커> 서평에 따르면 철저한 직역이라고 한다. 160년 동안 번역이 거듭되면서 이제 이 책에서 생소한 내용이 없는 이상, 역자는 ‘러시아어적인 표현’까지도 가능하면 온전히 영어권 독자들에게 전달할 야심을 갖게 된 듯하다. 이는 자연스럽다. 입장을 바꾸어 <춘향전>이 영어로 17번째 번역된다면, 역자는 평이한 영어 텍스트를 만들기보다는 독특한 한국어적 표현을 최대한 살리는 데 중점을 둘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이입되는 것은 볼레로, 퀸 같은 낱말만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고 처리하는 이국적인 어법들도 그러한데, 이 어법들을 ‘순수한’ 한국어에 위협이 되는 요소로 보고 배척하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어로 되어 있지만 낯설어 보이는 이 어법들이 늘 유쾌하고 사랑스러웠다. 금방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잘못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에 한 언어의 정보량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낱말의 개수뿐 아니라 이런 다양한 감정과 상황의 어법들이 증가하는 데 달려 있다. 이것들이 고유종이 아니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방침을 고집한다면 한국어는 필요 이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외국 문학을 읽을까? 문학의 향유를 위해서라면 이미 국내 문학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외국 문학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한국어의 모습을 번역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번역은 한국어를 위해 그 미지의 변방을 열심히 개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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